[마나토도] 그해 여름 소년 6

 프로 로드레이서 마나미 x 프로 로드레이서 토도 

연령, 미래 조작, 기억상실 요소 있음. 







"거실에는 리들리랑 LOOK을 걸어두는 거예요."




***


   후, 하고 숨을 내뱉으면 하얀 김이 서린다. 손끝이 딱딱하게 얼어간다. 옷깃을 여머도 서리는 추위는 마냥 차기만 했다. 장갑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은 그의 넓은 주머니에 손을 넣기 위함이었다. 륜행백이 없는 여행은 참으로 간만이라, 비는 어깨가 괜히 어색했다. 역에 내려서 천천히 길을 밟아갔다. 쌓인 눈은 밟을 때 마다 뽀득뽀득 소리를 냈다.

   우리는 사람이 밟지 않은 길로만 걸었다. 클라이머란 무릇, 처음을 갈망하는 인종이었다. 눈에 찍히는 두 사람의 발걸음을 간간히 뒤돌아 볼 때 마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리듬인지, 그러한 리듬이 아닌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눈송이들은 간간히 그의 긴 속눈썹에 내리 앉았다가, 차가움만을 남기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흰 모자와 흰 코트. 검은색 폴라티. 고등학생 때는 떡볶이 단추가 달린 걸 입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길고 여밈 단추가 속에 있는 것뿐이다. 안쪽에 핫팩을 달았을지, 달지 않았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조금 어른스럽게 입었다는 점과, 그걸 내가 싫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싼다. 그가 입은 코트의 주머니가 아니라, 내가 입은 패딩으로 손을 가져온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빈 주머니 깊은 곳에 대자 푸스스 웃는다. 꼭 내리는 눈 같다. 표정이 없으면 냉랭해 보이는 얼굴이 나 때문에 달라지는 걸 사랑한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여러 색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을 사랑했다. 제법 기른 머리카락 끝에 내리 앉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녹아 없어지거나 사라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손을 괜히 잡고 버스정류장까지 느리게 걸었다. 뽀득거리는 눈과 서려오는 추위 사이에 마주 얽은 손가락만이 따듯했다. 울음이 날 것 같아서 코를 킁킁거리자 고개를 돌려왔다.


   ―산가쿠?

   라고 불러오는 목소리가 좋았다. 귀에 감겨오는 앳된 목소리. 멀리서도 들리만큼 크게 외치는 게 아니라,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 목 끝이 간질거렸다. 버스정류장의 머리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벤치는 녹은 눈 때문에 질척이고 있었고, 우리는 그 아래로 들어갔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에 버스는 느릿하게 다니는 것만 같았다.

   인터하이 때 달려본 적 있는 길이에요, 라고 말하자 놀란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까지 고등학생이었지,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놀라울치만큼 다정했다. 나는 아직 그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있음에 안도하며 숨을 들이켰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찬 손가락을 만지면서 몸을 기대었다. 

   밀어내지 않는 것은 곧 있을 헤어짐을 위한 걸까.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나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는 상냥하다. 마지막으로 좋은 기억만을 남겨주려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한겨울 같은 사람. 나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의 결론을 담고 있지만 아직은 굳게 닫혀있는 얇고 예쁜 입술. 

   들려올 말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건 거북하다. 스포일러를 모두 알고 보는 스릴러 영화 같다. 나는 내가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그가 사라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마디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건 이별여행이었다. 나는 여전히 두근거림을 느낀다. 그를 볼 때 마다 숨이 막힐 것 같다. 여전한 아름다움과 여전한 설렘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만의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언제나 애매하다. 한 마디도 상의하지 않고 걱정 또한 보여주지 않은 주제에 멋대로 결론을 내고 그대로 실행한다. 삿포로의 눈만큼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오늘 몸을 겹칠 때 말할 말은 헤어지자.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은 사랑해. 그는 언제나 나를 두고 앞으로 달려간다.

   뒷모습을 보는 건 익숙하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내 앞에 있었다. 우리의 사랑에는 목줄이 없다. 길들여진 건 결국 나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를 나의 여백들에 대해서 나는 굳이 말하지 않는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거니와, 안다고 해서 멈춰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입을 맞추었다. 숨을 엮는 순간마저 다정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진파치는. 끝까지 애매하게 상냥하다고.




***


   “사이클링을 하고 싶어요.”


   그 목소리는 뜬금없게도 들려왔다. 토도는 손에 닿은 물기를 닦았다. 열어둔 창문에서는 후텁치근한 열기가 몰려왔다. 그는 냉토마토와 맥주를 들고 거실로 다가갔다. 마나미는 낮은 복층에 누워 있었다. 얇은 이불을 걸친 채로 핸드폰 게임을 하는 모양이었다. 퍼즐이 경쾌하게 터지는 소리가 났다.


   “사이클링?”

   “응. 토도 선배랑요.”

   “싫어.”

   “에이- 그러지 말구요.”

   “갑자기 왜?”

   “나, 요즘 좀 심심해서. 토도 선배는 매일 어디 가잖아요.”

   “그럼 니네 집에 가, 마나미. 네가 정말 개인 것도 아니잖아.”


   마나미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낑- 과 뀽-의 중간 정도로 들리는 말이었다. 그는 퍼즐을 톡, 톡, 터트리다가 망설이듯 손을 놓았다. 한참 들리지 않는 소리가 어색할 때 쯤 게임 종료 음이 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미는 다시 퍼즐을 터뜨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토도 선배의 강아지인데.”


   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두 사람의 여백에 퍼즐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멍, 멍멍.”


   마나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톡,톡톡톡, 핸드폰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고 있다가 토도는 맥주 캔을 깠다. 기린이치방이 맛있지 않아? 라고 묻는 목소리에 그는 이것만 마셔서. 라고 대답했다. 토도는 젓가락으로 토마토 위에 올린 미역 절임을 집어 들었다. 시큼한 초절임의 맛이 절묘했다.

   창가에서는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가 들렸다.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은 아니었다. 슬슬 가을이 오나, 싶은 날씨였다. 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마시는 거 재밌어? 라고 묻는 건방진 목소리에 어- 재밌어. 하고 대꾸하고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살짝 얼렸던 캔 표면에는 그새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도 줘요.”

   “개는 못 먹어.”

   “좀 치사하네?”


   마나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천천히 복층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단숨에 거리를 좁혀왔다. 예전부터 퍼스널 스페이스가 거의 없다시피 하던 후배였다. 마나미는 토도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기댔다. 나도- 하고 졸라대는 꼴이 가관이었다. 너는 어째 점점 개처럼 변해가는 것 같구나, 라고 말하자 마나미는 어설프게 웃었다.

   토마토도 맥주도 양보하기 싫었다. 토도에게 오늘은 왠지 그런 날이었다. 그러나 어깨로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마나미는 찰싹 붙어왔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끈적끈적해진다는 걸 이유로 그를 밀어냈다. 에어컨 리모컨을 찾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는 에어컨은 머리가 아프다면서 고개를 도리질했다. 토도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는 토마토의 중간을 들어 그의 입에 쏘옥, 넣었다.

   맥주도, 라고 졸라대는 걸 보다가 그는 마나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토라져서는 반 뼘 정도 떨어지는 걸 보다가, 토도는 맥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액체가 꿀꺽꿀꺽 움직이는 목울대를 보다가 마나미는 그 얇은 목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괜히 다시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파란 체향이 느껴졌다.


   “더워, 마나미.”

   “에헤헤.”

   “웃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 마.”


   토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옆으로 밀었다. 밀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마나미는 뚱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헤실헤실 웃었다. 언제나 웃음이 앳되고 헤픈 남자다. 문을 조금 더 열까, 싶었다. 괜히 그의 머리카락이 닿은 볼이 화끈거렸다. 토도는 모르는 척 맥주를 마셨다. 급하게 들이키는 술에 머리가 아팠다. 


   “나는 멍멍인데?”


   그의 파란 눈동자에 자신의 놀란 표정이 담겨 있었다. 마나미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는 다시 토도의 어깨에 제 머리를 댔다. 다시 그를 밀자 그는 머리를 어깨에 부벼왔다. 마-나-미-! 하고 짐짓 엄하게 이름을 불러봐도 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장난끼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의 개라구요.”

   “그건 네ㄱ…”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토도 선배애~ 


   밀어내도, 밀어내도, 그는 다시 거리를 좁혀왔다.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알기나 하고 있는 거니? 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모르기에 다가오고 거리를 좁힌다. 그에게 준 게 상처밖에 없을 텐데도 끈질기게 다가온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떨어진다는 그의 말에, 토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어떻게 취하면 얻을 수 있는 지, 그는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원래부터 영리한 녀석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마나미는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댔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방금 누울 때 귀에서 바사삭거리는 소리가 났다길래 귀를 파줄까, 하고 중얼거렸더니 금방 귀이개를 찾아오겠다면서 벌떡 일어섰다. 또 다시 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면서 호들갑을 떠는 그가 꼭 강아지 같아, 토도는 마나미의 머리를 대충 흐트러트리고 그런 건 대부분 방 서랍 옆 협탁에 놔둔다는 이야길 했다.


   마나미는 한참이 지나서 돌아왔다. 그는 귀이개를 들고 있었다. 다시 누워보라는 듯, 허벅지를 팡팡, 치자 부드럽게 웃으면서 허벅지에 고개를 댔다. 나 술 마셨는데, 라고 뒤늦게 생각나서 말하자 마나미는 뭘 어떻게 하던 괜찮다고 말했다. 토도는 그의 귀 옆 머리카락을 넘겼다. 귀이개의 끝은 뭉툭하고 완만했다.

   이 정도 마셔서 취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에게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다. 토도는 고개를 들고, 손목에 걸고 있던 머리끈으로 흘러내린 것들을 묶었다. 마나미는 그걸 빤히 보고 있었다. 괜히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또한 애매한 상냥함일까. 토도는 지금의 마나미가 대답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떠올리다가, 그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 때문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그다지 깊지 않은 곳을 천천히 설설 긁었다. 간지러운지 마나미는 몸을 움츠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마냥 맑게 퍼진다. 아앗, 하고 짧게 신음하며 몸을 움찔거리는 것에 놀라 귀이개를 빼자, 그는 괜찮다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따듯하고 묵직한 무게감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얇은 옷에 느껴졌다. 토도는 깊은 곳을 건드리지 않게 설설 긁었다. 천천히 빼내어 그것을 테이블 위에 톡톡 털었다. 귀이개 뒤에 걸려있는 솜으로 가볍게 털고, 부스러기들만을 긁어냈다. 깊게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그는 귀이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손가락으로 그의 귓구멍 속을 가볍게 후볐다.


   “아직도 덜그럭 해?”

   “모르겠어요.”


   마나미는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반대쪽으로 누웠다.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운 뒤통수가 보였다. 파란 여름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덜그럭거리는곳만 해줄 건데,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는 에- 하고 말꼬리를 늘렸다.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구하게 남아있는 버릇이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목소리를 들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주고 만다. 무심코 천사야, 라고 불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볼이 붉었다. 토도는 그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잘 보이질 않아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잡아 당겼다. 깨끗한데, 라고 말하면서 후, 하고 불자 다시 그는 자지러지듯 웃었다. 간지러워요 토도 선배.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오히려 더 간질거렸다. 토도는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귀 뒤로 넘겼다.

   귀이개를 쥐고 아프지 않게 긁었다. 속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겉만을 갉작였다. 마나미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처음보다 웃음이 덜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한숨처럼 사이클링이 하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 아까도 했던 이야기였다.


   “아줌마 자전거로 좋아?”

   “아니. 로드바이크.”

   “왜?”


   토도는 무심코 물었다. 마나미는 움, 하고 망설이다가.


   “선배가 타는 거라서.”


   라고 대답했다. 그는 거실 벽면 한쪽에 걸어둔 리들리가 꽤나 예뻤다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꿍얼거리는 목소리였다. 섬세하고 우아한 느낌이고 보는 것 만으로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꼭 토도 선배 같은 자전거 같아서, 타보고 싶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토도는 그의 귓바퀴를 귀이개로 설설 긁었다. 거긴 좀 아픈데,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손에 힘을 뺐다.


   “혼자 나가려고?”

   “아니, 나도 자전거 있었는데.”

   “마나미- 너 나한테 빚지고 있다는 자각은 있어?”

   “으음~ 일단 땡겨주시면 나중에 갚는단 느낌으로 갈게요.”


   일단 뭐든 다 기억이 나면~ 갚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마나미는 가볍게 말했다. 토도는 그의 볼을 꼬집었다. 말랑한 살을 힘을 주어 잡아당기다가 놓았다. 아파~! 하구 고개를 도리도리하는 그가 괜히 얄미웠다. 얄미워 할 구석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토도는 괜히 제 머리카락을 긁적이다가 숨을 내쉬었다. 발개진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으~ 아파요.”

   “그런 식으로 빌려갔다가 못 받은 게 한 둘이어야지.”

   “에- 기억 안 나는데요.”


   정말 뭘 빌려간지도 모르겠구, 라는 말엔 사랑, 이라고 대답할 뻔 하다 말을 삼켰다. 토도는 마나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볼을 쓸다가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제 아래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그저 천진했다. 고등학생 때에 비해서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가끔 그가 너무나도 환상 같을 때가 있었다. 토도는 그의 볼을 다시 꼬집었다.


   “항상 지각만 하고. 산 타다가 지갑이나 잃어버리고.”

   “음~ 기억 안 나는 데.”

   “그러다가 음료수 살 돈 없다고 말하고.”

  “그렇게 빌려가서 안 갚았어요?”


  토도는 가만히 생각했다. 청소 당번일을 당연히 잊어버리고, 잠이 많고,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는 자신의 마나미를. 천사 같은 얼굴로 졸면서도 산을 올라가기 이전에는 집중력을 올려오는 남자를. 졸업 후에 토도 선배가 없어지면 외로울 거라면서 울음 섞인 눈으로 말하다가, 잘 오르고 예쁘고, 말도 잘해서 의지했으며, 가장 존경하던 선배라고 말하던 그저, 후배이던 시절의 마나미를.

   그래서 자꾸 무르게 군다. 물러버린 과일은 곧 썩어버린다는 걸 알면서도. 토도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글쎄, 라고 대답했다. 마나미는 곧 그의 대답에 흥미를 잃어버린 듯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안 갚았으면 천천히 갚아 가면 된다는 말을 쉽게 말하는 그의 표정을 보자 괜히 아득해져서, 토도는 테이블 위에 손을 뻗어 맥주를 집었다. 캔을 딴 지 시간이 되어 써져버린 술을 들이켰다. 마나미는 다시, 


   “토도 선배랑, 사이클링 할래요.”


   라고 조르듯 말했다. 나 자전거 선수였다고 하니까 자전거 타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뭔가 알고 반장한테 전화할래요~ 하고 응석을 부리듯 다가오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스무살 이후를 전혀 알지 못한다. 영악한지, 친절한지, 상냥한지, 천사 같은 성정은 그대로인지. 

   그래서 말에 품고 있는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라면 경향성이라도 살필 텐데, 그는 너무 잘 알던 사이였기 때문에 표정을 읽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마나미는 프리스비보다는 자전거가 좋을 것 같다면서 그에게 네? 하고 다시 물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계속 대답을 재촉했다. 버릇없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토도는 가만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지금 당장은 안 돼.”


   라고 대답했다. 리들리는 자신이 길들여 놓은 거고, 발목도 아프기 때문에 네가 아줌마 자전거보다 먼저 가버리면 쫓아갈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마나미는 프로라면서 핸디캡 안 줘요? 라고 말하며 눈을 깜빡였다. 이기고 싶어? 라고 묻자 당연하죠. 나보다 언제나 빨랐다면서요, 라고 말했다. 어이없고 당돌한 목소리였다. 토도는 혀를 찼다.


   “어이없어.”

   “왜요?”

   “타는 법은 기억 해?”

   “아마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마나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토도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그런데 날 이겨?”

   “뭔가 초심자의 행운 같은 걸로?”

   “역시- 어이없어.”


   토도는 고개를 저었다. 마나미는 묶어 내린 그의 머리카락 끝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고양이가 채터링을 하듯 가볍게 건드리다가 손가락을 벋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천천히 빗었다. 관리가 잘 된 머리카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안돼요? 라고 질문했다. 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마나미에게 그는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기면 소원 들어줘요.”

   “당연히 이길 건데.”

   “모티베이션이 필요하잖아요. 슝- 나가려면 언제나 필요한데.”

   “기억해?”

   “아니. 그냥 느낌인데요.”


   뭔가 당연히 그래왔을 거라는 느낌. 마나미는 부드럽게 웃었다. 쌓인 기억이 없을 뿐, 눈 앞의 이 남자는 마나미 산가쿠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도는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 가만 쓰다듬었다. 마나미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부끄럽다고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거리 감각이 고장난 것 같았다. 잘 쌓다가 한 번에 무너진 젠가 블록 따위를 생각하며, 토도는 가만, 가만, 그의 이마를 덮으며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쓸었다.


   “자전거 대여소라던가.”

   “응.”


   나는 선배랑 내 자전거가 타고 싶어. 마나미는 가만히 말했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의 마나미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하고, 조금은 달콤해서 토도는 그의 응석을 받아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며칠 전에도 찾아갔던 전철역을 떠올렸다. 얼마간은 병원 까지도 간 적이 있었다. 자전거 주차장에 놓여있는 하얗고 반짝반짝한 LOOK. 안장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따로 관리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자전거를 타고 싶지 않아할 줄 알았다. 타인과의 연결고리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사고를 당했으니까. 병원에서 나오기 위해서 미련 없이 맡겨버리는 도구 정도면 애착도 없을 줄 알았다. 그래서 찾아줄까 하다가도 번번이 뒤를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오지랖이 될 것만 같았다. 토도는 눈을 감은 그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었다. 

   눈을 감은 채로 마나미는 속삭였다. 나는 선배한테 뭔가를 더 빌려간 적이 있었나요? 라고 묻는 목소리에 토도는 여러 가지 물건의 이름을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주제에 3학년인 자신에게 줄기차게 빌려갔던 넥타이나, 체육복, 교복 마이나 사전. 빌려간다면서 돌려주지 않았던 사탕과 초콜릿. 드링크 따위의 것들. 

   옷 같은 건 돌려줬었죠? 마나미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표정을 하며 질문했다. 그 목소리는 겨울날의 핫초코 같이 달콤해서 토도는 잠시 망설였다. 항상 햇볕 냄새가 났었어, 라고 말하기에는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미는 안 돌려준 건 없는 것 같은데요~ 라면서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열어둔 창에서 후덥지근한 바람이 밀려왔다. 테이블 위의 토마토에서는 물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애매하게 꼬여 있는 초절임의 모양을 보다가 눈을 굴렸다. 그가 물건을 돌려주면 언제나 햇살 냄새가 남아 있었다. 여름의 쨍한 햇살에 말린 옷가지들을 떠올리며 토도는 돌려줬어, 라고 대답했다. 그는 가만히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심장이 애매하게 뒤었다. 숨소리를 내면서 호흡할 것 같았다.

   한 번 반했었던 상대에게 세계가 다시 흔들린다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토도는 제 허벅지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그의 머리의 무게가, 꼭 저를 이 공간에 머무르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제게 가하는 힘은 꼭 중력 같았다. 토도는 그의 궤도 안에서 빙글빙글, 고리처럼 돌아가는 소행성을 떠올렸다.

   슬슬 비행기 표를 끊어야 하는데, 토도는 일부러 그런 로맨틱하지 않은 것들을 떠올렸다가 마나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다시 그걸 정리해주자 마나미는 찌푸린 얼굴을 폈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청년에게는 제가 모르는 시간이 묻어 있었다. 또, 뭔가 있어요? 라고 마나미는 질문했다. 토도는 같이 있었던 건 고작 사 년 밖에 없었고, 고등학교 이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대답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이 다시, 아무것도 없었다. 연극 지문의 (사이)나, 문단과 문단 사이의 넓은 여백 같았다. 토도는 미지근해진 맥주 캔을 들었다. 물방울이 떨어졌는지 마나미가 얼굴을 찌푸렸다. 토도는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그는 여전히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여름 하늘처럼 맑고,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코가 찡하도록. 토도는 자신이 그의 얼굴에 약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다 소소한 거네.”

   “소소한 거면 안 돼?”

   “뭔가 쳐서 갚기에는 좀 애매한데.”

   “뻔뻔해.”

   “고등학교 선배 집에 눌러있는 것부터가 뻔뻔한 거죠.”


   그러네. 라고 대답하며 토도는 그의 입술을 꼬집었다. 마나미는 괜히 멍, 하고 말했다. 멀어져야지 하고 생각한 순간에 이런 식으로 환기를 시키는 건 영리한 건지, 아니면 본능적인 건지 알수 없었다. 아직 놀이는 끝나지 않았다. 토도는 주인으로써 그에게 잘 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조도가 낮은 형광등을 올려다보다가, 토도는 창밖을 보았다.

   셈해보면 휴가는, 며칠 남지 않았다. 어림잡아야 이 주 정도 남았을까. 축제는 보고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그는 마나미의 볼을 꼬집었다. 반장에게 연락 해. 병원에 갔는데 전단지 붙어 있더라. 라고 말하자 마나미는 입술을 뾰쪽거렸다. 곤란할 때 보여주던 버릇이었다. 왜 그렇게 싫은 건데? 라고 질문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외로 고집이 셌다. 그는 즐거운 이야기만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집에 가는 게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야?”


   마나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토도는 그의 앞머리를 내렸다. 드러난 이마가 가려졌다. 마나미는 토라진 척 돌아누웠다. 그의 귓바퀴가 보였다. 토도는 바닥에 내려두었던 맥주 캔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상체를 숙이자 마나미의 어깨와 몸이 닿았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술이 오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 캔 더 마실까. 생각하다가 그는 눈을 감았다.

   답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대화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다. 토도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아라키타를 떠올렸다. 갈 곳 없는 개를 들여 줄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니까 이 고민 또한 해결해주지 않을까. 토도는 가만히 생각하며 손끝에 느껴지는 그의 피부와, 더운 여름을 느꼈다. 고민 있어요? 마나미가 문득 물었다. 토도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이라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눈을 떴다. 마나미는 가만, 누워 있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 마다 얇은 반팔 너머로 숨이 느껴졌다. 그렇게 더운 여름은 아니었지만, 샤워를 하고 싶었다. 다시 멀어질 대였다. 토도는 그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는 몸을 일으키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또 빌린 거 있어요?”

   “다 갚아주게?”

   “그냥. 이야기 하고 싶어서.”


   마나미는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토도는 소파에 등허리를 대고 있다가, 그에게 여행 자금, 이라고 대답했다. 헤에, 어디로 갔는데요? 유럽? 미국? 부다페스트? 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토도는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었다. 그와 함께 내렸던 하얀 역. 겨울의 설원이 아름다운 그 곳을 떠올리다가 안 친해서 몰라. 라고 대답했다.

   나랑 너는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단다. 마나미. 라고 괜히 꼬집어 말했다. 요 이주 동안 열심히 친해진 거야. 떠안은 걸 매몰차게 내쫓을 정도로 도량이 좁은 남자가 아니니까. 토도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꼬집어 말했다. 마나미는 가만히 그의 배에 숨만 내쉬다가 나는 어딜 갔을까요? 라고 질문했다.


   “바다일수도 있겠지.”

   “나는 산을 좋아한 게 아니었나?”

   “바다를 보는 게 좋았댔는데. 산은 올라가는 쪽.”

   “고등학생 때 그런 말을 했었나?”

   “누군가가 널 보면서 산토리니가 생각난다고도 했지.”


   포카리스웨트에서 나오는 데 말야. 토도가 그렇게 말하자, 마나미는 고등학생들이 강당에서 춤추는 CF만 기억이 난다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신학기 같은 봄에 춤을 추는 영상이었나, 아니면 쨍한 여름을 배경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던 세라복과 가쿠란의 학생이었나. 마나미는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눈이 마주쳤다. 조금 물기 어린 눈이었다.


   “그것도 바다였을 것 같은데.”

   “아스팔트가 수평으로 있고, 버스도 세워져 있고?”


   그랬었나. 토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나미는 잠시 뚱한 얼굴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려운 건 잘 모르겠지만, 어떤 것도 알로- 하.’ 여전한 미성으로 부르는 노래는 반주는 없었고, 원래 음 보다는 반 키 높았지만 어쨌든 그 멜로디였다. 이건가? 라고 묻기에 토도는 그 소절 다음에 배경이 보라색 하늘에 캠프파이어로 바뀐다고 설명한 다음,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야.”


   라고 노래했다. 마나미는 그 다음 가사가 기억나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웃긴 표정이었다. 토도는 호쾌하게 웃었다. 떠올리려 노력하는 지, 그는 조용히 해봐요! 라구 드물게 짜증섞인 목소리를 냈다가, 음만은 기억하고 있는 듯 허밍으로 두 소절 즈음을 가만히 흥얼흥얼 거리다가, 


   “시간이여 멈춰라, 레츠고-” 

   하고 노래했다. 그 다음에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원래 박자보다 다섯 배는 느리게 다음 가사를 불렀다. 너의 꿈과 나의 꿈- 우연히 만나 이루어지게 될-거야- 아- 하고 엉망인 노래에 토도가 다시 웃음을 터뜨리자, 마나미는 그 다음 가사 알야요? 라고 질문했다.


   “너의 꿈과 나의 꿈~”

   “그 다음에는?”

   “상상 이상의 미래로-”


   그리고 이 장면에서는 파도를 발로 밟고, 배를 드론으로 잡아. 토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억이 돌아온 것 같아? 라고 물었다. 이 시즌에 방송하는 광고가 아니었다. 대답이 들릴 때 까지 토도는 숨을 멈추었다. 괜히 긴장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마나미는 고개를 도리도리 하면서 가끔씩 그냥 문득- 튀어나올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뭔가 의식의 흐름처럼 툭, 툭 생각나는 거라고 말했고 토도는 불안한 얼굴로


   “다행이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저를 골똘히 보고 있는 마나미의 시선이 거북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마나미는 손을 뻗어 토도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내가 토도 선배한테 돈을 빌려서 여행을 갔을 정도면, 뭔가 깊게 남아있겠죠? 그의 목소리는 여름 새벽처럼 나긋나긋했다. 토도는 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개를 다루듯 마나미의 턱을 가볍게 긁다가, 그렇겠지. 정도로 대답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디로 갔을까. 마나미는 혼자 고민하는 듯 보였다. 마나미는 여러 여행지를 말했다. 그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예쁘니 프랑스에 갔을 때 여행을 가보라고 말했고, 헝가리 쪽의 맥주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했다. 너 기억 다 한 거 아냐? 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마나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리 엄마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 라고 말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는 지금 핵심 기억의 주변을 빙빙 도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주변인인 이상 참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토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름밤은 천천히 저물어갔다. 토도는 다시 맥주 캔을 들었다.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비웠다. 맥주 상표를 보다가 괜히 그것이 안 보이는 면으로 캔을 돌려 두었다. 냉토마토는 이미 미적지근해져 있어서 아마 버려야 할 것 같았다. 나도 맥주 마시고 싶다~ 라고 말하는 마나미의 코를 누르면서 토도는 냉장고에 있으니까 먹던가, 아니면 그냥 자던가. 라고 말했다.

   술주정뱅이는 침대에 들이지 않는다는 선배는 오늘 밤 문을 잠그고 잘 것을 예고했다. 왜 그런 것을 알려주는 지 마나미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어나겠다는 그의 몸에서 머리를 치웠다. 마나미는 소파로 쪼르르 올라갔다. 토도는 빈 맥주 캔을 들고 일어났다. 냉토마토-정확히는 차가운 토마토였던 것이지만-를 치우려 하기에 자신이 먹겠다고 말한 다음 그를 배웅했다.


   토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소리 없는 발걸음에서 묘한 삐걱거림이 나는 것은 그의 발목 탓이 아닐 터였다. 마나미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한쪽 다리를 끌어안고 그가 맥주캔을 버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겨울 같은 체향을 떠올리며 마나미는 냉장고 쪽으로 갔다.

   냉장고에 맥주가 남아있지 않아 냉동실을 열었다. 꽝꽝 얼어있지 않은 삿포로 캔이 있었다. 버릇인가? 생각하다가 캔을 땄다.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마나미는 거실로 다가갔다. 그가 치우지 않은 젓가락과 토마토가 들어있는 얇은 그릇을 보았다. 토도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제가 항상 누워있는 낮은 복층이 한 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그 곳을 가만히 보다 마나미는 젓가락으로 미역 절임을 집었다. 짠 맛이 났다. 토마토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맥주보다는 찬 사케가 더 어울리는 맛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토도 본인도 맥주 같은 술보다는 사케를 더 잘 마실 것 같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사두지 않는 건, 이 집에 남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마나미는 토도가 가버린 자리를 바라보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다가, 다시 토마토 옆에 둔 미역 절임을 먹었다. 묘하게 아저씨 같은 안주였다. 그는 여행 이야기를 할 때 망설이던 토도를 떠올렸다. 제 앞에서 하는 거짓말에는 한없이 서툴렀다. 그걸 귀엽다고 봐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마나미는 턱을 괴었다. 


   “나랑 갔었구나.”

   남는 것은 한숨, 그리고 약간의 씁쓸함뿐이었다.



***


    아라키타는 헐레벌떡 뛰었다. 이상한 라인이 도착해 있었다. 완전히 망가졌어, 라는 이상한 메시지였다. 발신인은 토도 진파치. 원래대로라면 병원에 있을 시간이었다. 그가 다니고 있는 병원은, 그가 방문할 때 전화선을 빼놓는다고 했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도 통 받질 않았다. 병원으로도 전화가 안 될 걸 알고 있으니까 답답하고 초조했다. 

   지금 어디야, 라고 묻자 집 근처의 카페 주소를 말했다. 몇 번 가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회사에 이유 없이 반차를 냈다. 내일 모래가 전지훈련인데 어딜 가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상사에게 혼나는 건 애교고, 잘릴지도 모른다. 핸드폰은 여전히 울렸다. 전화를 받고 나서 세 시간 후에 들어가겠다는 보고를 했다.


   ―무슨 심각한 일 있는 거야?

   라는 상사의 말에 친구가 심각하게 다친 것 같다는 말을 그제야 했다. 별 거 아닌 말을 못해서 그렇게 사람을 애 먹이냐는 타박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제야 아라키타는 자신이 그 별거 아닌 걸 말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무 불안해서 그랬다는 말에 상사는 세 시간 후에 다시 보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놀란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완전히 망가졌다는 말은 무슨 뜻인 지 알 수 없었다. 병원에 있을 시간에 굳이 메시지를 남기고,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는 게 불안했다. 토도 진파치는 완결된 남자다. 그는 대부분의 결정을 혼자서 한다. 나름대로 심사숙고해서 내린 판단들은 대부분 최선이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아라키타는 자전거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던 고등학교 삼학년의 토도 진파치를 기억한다. 마키시마가 영국으로 가기 때문에, 라이벌을 상실. 그러면 대학에서는 다른 전공을 하고 자전거를 안타겠다. 라는 선언을 겨울의 졸업 파티에서 했다. 처음 듣는 일이었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생각해온 거라는 말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후쿠토미도, 신카이도, 심지어 마키시마까지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토도 진파치는 판단에 자신만을 남기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그의 모든 판단은 냉정하고 이기적이다.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효율적인 일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걸 듣는 사람에게는 ‘통보’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단 것이었다. 아라키타는 자신이 듣는 이 말 또한 이미 무언가를 결정한 다음에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다짜고짜 개와 함께 달릴 수밖에 없었다.

   멍, 하고 소라가 짖었다. 혹시 나쁜 선택을 할까봐 데려온 놈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같이 다니던 네 명 중에 가장 균형 잡힌 사람인 주제에 가끔씩 이렇게 폭탄 같은 말을 던진다. 나쁜 버릇이란 자각은 있는지 머리를 뜯어보고 싶었다. 아라키타는 지금 일본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스 시즌 도중의 프로선수가 나오는 것 보다는 회사원이 나오는 게 훨씬 간편해서 다행이었다.

   땀이 줄줄 흘렀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달리던 중간 중간 개는 멈추어 섰다. 아라키타는 헥헥거리는 리트리버를 어르고 달랬다. 니 옛 주인 보러 가는 거야. 좀 만 더 달려줘! 라고 애원하듯 속삭였다. 개는 느긋했고 속이 타는 건 아라키타 뿐이었다. 그는 목줄을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개는 표지판 아래 그늘에 멈추어 용변을 보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타들어가는 속을 개는 모른다. 언제나 그렇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가 말렸다. 답답했다. 토도의 집은 언덕 위에 지어져 있다. 낡은 마을버스가 아슬아슬하게 올라가는 그 길의 경사는 여름에 더욱 힘들어진다. 클라이머답다면 클라이머다운 선택이었지만 방문객에게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아라키타는 그가 집을 처음 짓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꽤나 진지하게 사귀고 있다던 남자에게 차이고 나선 이런 언덕에 갑자기 땅을 사더니, 집을 올리기 시작했다.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었다. 공사 감리감독을 당시 대학생이던 소꿉친구에게 시키면서까지 지을 이유를 아라키타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지나가는 말로 물었더니, 그냥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는 말이 돌아왔다. 진짜 이상한 놈이다. 라는 평가에 전화 너머 토도는 마냥 쾌활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것도 다 뜻이 있어서겠지, 싶었다. 그 집이 팔리지 않는 이유를 아라키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소라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을 알고 있다는 듯 빠르게 뛰는 강아지에 아라키타는 리드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프로 선수가 내뱉는 『망가졌다』는 말의 무게감을 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멀리 카페의 입간판이 보였다. 안에 들어가 있나? 싶어 목을 빼고 둘러보았지만 보이질 않았다. 리트리버가 언덕을 달려갔다. 귀가 팔랑팔랑 거렸다. 아라키타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자전거라면 무리 없는 언덕도 두 발로 딛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목줄을 잡은 손바닥이 아팠다. 그는 카페 문 앞에 섰다.

   긴장에 땀이 흘렀다. 착잡했다. 머릿속엔 자꾸 부정적인 이미지만이 떠올랐다. 매미는 눈치 없이 울었다. 경사를 달려올라온 턱에 숨이 턱끝까지 찼다. 입고 있는 와이셔츠가 온통 땀으로 젖었다. 그는 하, 하고 숨을 내뱉었다. 『완전히 망가졌어』라는 네거티브한 말을 내뱉은 토도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멍, 하고 소라가 짖었다. 멍! 멍! 하고 짖는 강아지를 진정시키면서 아라키타는 붉은색 페인트를 엷게 칠한 문을 바라보았다. 착잡했다. 발로 땅을 두드렸다. 구두 굽이 탁탁 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누군가의 발소리와 함께 개가 더 큰 소리로 짖었다.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불안했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싶었다. 멍! 멍! 멍! 멍! 리트리버는 세게 소리쳤다. 목줄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아라키타는 개에게 주의를 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파란 머리카락, 파란 눈동자.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얼굴. 

   눈이 커졌다. 놀라움에 삿대질을 했다. 야 너! 너! 야! 하고 짧게 조각난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건 틀림 없는 마나미 산가쿠였다. 하코네 산을 홀로 올라가다가 실종되었다는 후배의 낯짝은 상한 부분 없이 온전했다. 안녕하세요~ 라고 능글거리며 말을 붙여오는 꼬라지가 수상했다.


   “너!”

   “좋은 오후죠~”

   “그렇게 속편하게 할 말이야?”


   그를 찾는 사람들의 문자는 여전히 매일, 매일. 도착하고 있었다. 아라키타는 야! 하고 다시 소리쳤다! 너는 어디 있다가 그렇게 속편하게 낯짝을 들이미는 거야?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페 안에 있을 토도에 대한 생각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모든게 끝났다고 말할 정도면 이 자식을 절대로 보여줘서는 안 된다.

   찾은 건 찾은 거고, 해결해야 할 일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아라키타는 눈 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몇 달 전에도 만났던 후배였다. 낙차하고 병원에 있다가 무일푼으로 사라진 것 치고는 묘하게 때깔이 고왔다. 옷에는 주름 하나 없었고, 더러운 구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마나미 산가쿠. 비슷한 사람이라도 보셨다면 연락 부탁합니다, 라는 메시지의 절박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라키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그는 토도를 마나미와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만남은 후폭풍이 크다. 마나미는 쪼그려 앉아 개와 눈을 마주쳤다. 그르릉거리던 소라는 어느새 꼬리를 흔들며 마나미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마나미는 만져도 되나요? 라고 물었다. 속도 모르고 태평한 목소리였다. 그 다운 모습이었지만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잘 지냈어? 라고 묻자 그럭저럭,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나미는 네가 소라구나? 라고 물었다. 그는 리트리버의 귀와 턱을 꼼꼼하게 쓰다듬었다. 니가 소라를 어떻게 알아? 하고 퉁명스럽게 묻자 눈앞의 청년은 여름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적어도 『마나미 산가쿠』보다는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너.”


   아라키타는 그를 찾는 메시지에 적혀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마나미 산가쿠, 프로 로드레이서. 스물여섯 살. 남자. 비오는 날 하코네 산을 혼자서 올라가다가 낙차 한 것으로 추정. 이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단기적인 기억상실이 온 상태입니다. 이 사람을 보신 분은 아래의 연락처로 연락 바랍니다. 마나미는 개를 쓰다듬는 데에 열중하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라키타 선배, 맞죠?”


   묘한 목소리였다. 아라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마나미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치를 소라가 맴돌았다. 수상한 냄새가 났다.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아라키타는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원래 파악하기 힘든 사차원 후배였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한여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불안하기만 하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나미는 태평하게 웃다가 일단 들어갈까요? 라고 말했다. 




***


   토도 진파치는 륜행백을 내려놓았다. 의자의 맨 끝 자리가 비어있어서 다행이었다. 지하철은 일정한 템포로 덜컹거린다. 몇 번이고 이어진 환승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햇살은 여과 없이 내리쬔다. 여름의 지하철에는 꿉꿉한 냄새가 묻어 있었다. 계속 오갔던 길이었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운반이었다. 그는 륜행백을 슬그머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하얗고 반짝반짝한 자전거였다. 블랙과 레몬옐로, 때때로는 빨강을 쓰는 브랜드인데, 그는 흰색을 고집했다. 가장 처음 받은 자전거가 그 색이라는 어이없는 이유에서였지만, 새파란 그와 새하얀 자전거는 퍽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래. 여름 하늘과 구름 같았다. 그런 사람이 오르막에서 쭉 뻗어나가며 바람이 올 때에는 날개를 펼친 것 같은 주행을 하니 시선을 끌지 못할 리가 없었다.

   토도는 주황색 하늘 너머로 퍼지는 흰 구름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비 소식이 없는 여름이었다. 메말라버릴 것만 같았다. 아까 역에서 음료를 사는 게 좋았을까. 그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체력적으로 지친 건 아닌데 묘하게 기운이 빠졌다. 올 여름은 액땜을 거하게 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바람에 모양을 바꿔가는 흰 구름뭉치를 바라보았다. 그 온화한 풍경은 끊이지 않을 듯 이어지다가 이내 역 플랫폼에 가려져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와 무슨 결말을 보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도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는 처음이었다. 엉망으로 얽혀버린 매듭 같았다. 이제 잘라내야지, 마음을 먹다가도 얼굴을 마주하면 무르게 된다. 이건 그 겨울의 그 애가 말하던 『애매한 상냥함』밖에 되질 않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해주고 마는 것이다.

   토도는 턱을 괴었다. 볼을 지그시 눌렀다. 미련덩어리, 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 애와 헤어진 이후 사랑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사랑한 모두에겐 진심이었다. 다만 잘 맞물리지 않은 구석이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사랑이란 한 번에 찾아오지 않는다. 서로 맞물리지 않는 부분을 이해하고, 맞춰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감정에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겨울의 노을처럼 쉽게 저물 뿐이었다. 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에만, 자신이 없었다. 다른 모든 것은 계산하고 이겨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 하나만 어려웠다. 속이 끓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덜커덩거리는 전철 소리가 귀에 고여 있었다. 몇 해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여름의 풍경처럼 이것 또한 변하지 않는 소리였다.

   마나미는 소라처럼 버려진 개가 아니다. 돌아가야 할 곳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얽혀있으며, 일본에서 살아왔던 사람. 집 근처에는 그를 찾는 전단지가 붙어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실종에 대해서 말한다. 토도는 머리띠를 다시 고쳐썼다. 앞머리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긴 머리가 덮은 뒷목이 화끈했다.


    “쓸데없는 미련인데.”


    어째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소라가 좋아했던 애착상자를 떠올렸다. 마음을 정리하는 건 토도 진파치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었나, 싶어 웃었다. 사람을 만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갈등했던가. 하고 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웃을 일이 아니었지만. 토도는 길고 깊은 숨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됐는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나미는 정이 많다. 기억을 잃어도 그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삿포로에서 헤어지자고 말한 건 마나미였지만, 더 심하게 아픈 것도 마나미였을 것이다. 그 애는 언제나 상냥하고 사랑스러워서, 마음에 드는 것은 소중히 여겨준다. 그런 타입의 사람은 언제나 잘라내는 걸 어려워한다.

   1학년 여름. 인터하이의 패배 원인이었던 물병을 버렸던 것만으로도 울적하던 그를 기억한다. 학교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고작 물병 하나를 가지고 울먹이는 것을 끌어안아 달랬다. 하물며 달리는 법을 알려준 선배이자, 연인이라면 어떻겠는가. 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토도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언제나 헤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늘 상상해오던 일은 현실로 닥쳐왔을 때 놀랍도록 냉정해진다. 그는 그 하얀 겨울을 떠올렸다. 먼저 떠나려는 자신의 팔목을 잡고 마나미는 엉엉 울면서 헤어지자고 말했다. 시뮬레이션 한 범위 내의 일이었다. 카페인을 마신 것처럼 심장이 두근, 두근 뛰었다.

   자신의 표는 아침 열차, 그의 표는 저녁 열차였다. 한 번만 잡아주면 안 돼요, 라고 묻던 어린 연인을 떠올리며 토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첫사랑이 평생,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를 생각할 때 마다 종이에 베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그의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처음 주워 오질 말았어야 했다. 병원이 싫다고 하는 말을 듣지 말아야 했다. 그의 반장에게 연락해야 했다. 그녀에게 그가 쓰러져 있다고 알렸어야 했다. 어쭙잖은 간호가 아니라. 토도 진파치는 자신이 범한 실책을 세었다. 열 손가락을 모두 써도 모자란 양이었다. 속이 답답해져왔다. 지하철이 멈췄다. 문이 열리고, 밖의 더운 공기가 쏟아졌다.

   기억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보던 마나미에게,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어?’ 라고 질문한 건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면 안 됐었다. 오늘 밤에라도 연락을 해야 했다. 그와의 사이클링을 위해 자전거를 찾아올 게 아니라, 그녀와 그의 가족들, 그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돌려두어야했다.

   유기된 강아지를 주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착각을 하고 있었다. 토도는 원래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럴 줄 알면서도 여전히 선택권을 그에게 주고 있는 것은, 모든 걸 알게됐을 때 그가 어떻게 굴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몇 번을 상상해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던 사람인데 파악할 수 없었다. 토도는 거실에 있는 두 개의 스탠드를 떠올렸다.

   집을 설계할 때 왜 두 개를 달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 곳에 나란히 걸어둘 두 대의 자전거를 떠올리다가 실소했다. 꼭 사랑에 빠진 것만 같았다. 자신이 두 번 실수할 리 없었다. 마나미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희극이 어디 있어,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륜행백 속의 흰 자전거를 들여다보았다. 토도 선배 것도, 내 것도 흰 색이에요, 라고 말하던 앳된 목소리를 듣는다.

   더 이상 의미가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떠올릴 때 마다 다른 생각을 한다. 모노톤이던 세상은 여름빛으로 물든다. 세상이 색체를 가지게 되는 것은 마나미 때문이었다. 애매하게 밀어내지 말아야 한다. 손아귀에 쥐었다고 좋아할 나이는 지났다. 이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토도는 이미 이해하고 있는 사실을 되새겼다. 마나미 산가쿠는 토도 진파치를 위해 준비된 강아지가 아니었다. 

몇 번이고 곱씹은 말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철에서 나가 자전거 거치대로 갔다. 그러다가 허탈하게 웃고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습관적으로 자전거를 내려놓고 조립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자전거 없는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노을은 여전히 느릿느릿,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여름이라 날이 긴 탓이었다. 

   집까지 가는 길은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택시를 타고 있으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한없이 길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뒷좌석에 자전거를 밀어놓고 꾸겨지듯 탔다. 집 주소를 말하면서 미터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토도는 뒷목을 덮은 답답한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옆으로 내렸다. 머리카락에 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에어컨을 틀어드릴까요, 라고 물었다. 토도는 창문을 열겠다고 대답했다. 낡은 자동차의 창문에선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참으로 멋없는 소리였다. 토도는 멍하게 밖을 바라보았다. 자전거를 탈 때 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이 어색했다. 그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아 귀 뒤에 꽂아 넘겼다.

    하늘이 예쁜 곳이었다. 지대가 낮아 하늘이 잘 보이고, 언덕이 높아지는 곳이었다. 굳이 이곳에 집을 지은 건 그 때문이었다. 산과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슈사쿠의 자전거 집이 로드를 몰고 갈 정도의 근처에 있었다. 가끔씩 이쪽 언덕을 지나가는 로드 바이크 행렬도 볼 수 있었다. 토도는 눈을 깜빡였다. 

모두, 마나미가 좋아했던 풍경이었다.


   집에 가까워질 때 까지 토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다스러운 택시 기사는 그에게 몇 번이고 말을 걸었지만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풍경에 취할 것만 같았다. 이미 인생에 녹아있던 그를 어떻게 떼어낼 수 있을까. 토도는 한탄했다. 이쪽에서 언덕을 올라가면 됩니까? 운전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언덕 위의 이층집이라고 대답했다.

   택시기사는 언덕 밑에서부터, 집이 참 멋져 보인다는 말을 했다.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원도 멋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작게 웃었다. 언덕 끝까지 올라 택시비를 계산했다. 능소화와 해바라기가 잔뜩 피어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늦여름인데도 아직 지질 않았다. 토도는 그것들이 저물기 전에 떠나야겠다 생각했다.

   정원에는 군데군데 파란 페인트로 칠해둔 곳과, 나무의 결을 살려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택시기사는 떠나기 전 해바라기가 멋있다는 칭찬을 했다. 토도는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 세 가지를 주신 남자. 이 토도 진파치의 집이니까요, 라고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택시는 천천히, 느린 속도로 경사가 심한 언덕길을 내려갔고, 토도는 대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노크할까 하다가, 문을 열었다. 열려 있었다. 체인이라도 걸어두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게 분명했다. 산가쿠, 아니. 마나미. 하고 이름을 부를까 하다가 얌전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토도는 문을 잠그고 체인을 걸었다. 복도를 가만히 걸었다. 두리번거렸다. 집 안은 조용했다. 무심결에 소라, 라고 부를 뻔 했다. 이미 가버린 개의 이름을 부르는 건 별로 좋은 습관이 아니었다.

   사랑, 이라는 말은 너무 무겁다. 이 비틀린 관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달콤하다. 다시 그에게 반했을 리는 없다. 그를 보면 심장이 뛴다. 세게 뛰는 그 리듬은 아마, 제가 잘못했기 때문에 삐져나오는 죄책감일 것이었다. 그는 또 다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 곳에 있던 말던 간에. 삿포로에서 하고 싶었던 것처럼. 또 다시.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짐은 몰래 슈사쿠나 아라키타에게 보내놓으면 들키지 않는다. 다녀오세요, 라고 말하는 마나미를 남겨두고 새벽 같이 택시를 타고. 또, 그리고. 또. 토도는 마나미의 자전거가 든 륜행 백을 내려놓았다. 힘없이 소파에 앉았다.

   복층을 올려다보아도 마나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층에서 자고 있을까,를 생각하면서도 찾아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면 정말. 말도 없이 가버린 걸 수도 있겠지. 그는 자신이 떠나기 전에 그가 떠나버린다면, 어쩌면 그게 굉장히 깔끔한 엔딩이 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맘속에서 섞이지 않은 채 빙글빙글 돌았다. 부유하는 망상에 속이 어지러웠다. 이런 술렁임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토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갔다. 맥주 두 캔을 꺼내서 냉장고 속에 넣는다. 마나미의 버릇이었다. 그는 여전히 제게 남아있다. 사랑을 끝낸 다음에 더 힘든 것은 그였을 텐데, 그를 추억하는 것은 어째 제 몫인 듯 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토도는 맘속으로 날짜를 셌다. 역시 어서 출국을 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었다. 휴가가 모두 끝나기 전에 프랑스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팀메이트가 보고 싶었다. 그는 오랜만에 후쿠토미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느끼며 그는 창을 내다보았다. 보랏빛으로 보이는 하늘에 별이 드문드문 떠 있었다.

   답답했다. 출구가 없는 여름처럼 막막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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