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토도] 그해 여름 소년 8

프로 로드레이서 마나미 x 프로 로드레이서 토도 

연령, 미래 조작, 기억상실 요소 있음. 







"근처엔 같이 달리거나, 올라갈 수 있는 산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


   아라키타는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소라의 꼬리가 좌우로 붕붕 흔들렸다. 여름의 리트리버는 움직일 때 마다 털이 날렸다. 털결을 쓸어내리다가, 튀어나온 부분을 뽁, 하고 빼자 죽은 털들이 빠졌다. 마나미는 콜록, 콜록, 기침을 하다가 빗을 들었다. 영리한 리트리버는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앉았다. 빗질을 하는 사각사각한 소리가 났다. 털이 우수수 빠지는 꼴을 보며 아라키타는 숨을 내쉬었다.

   비앙키를 정비하기 위해 까는 매트는 이미 소라의 털로 뒤덮여 있었다. 마나미는 털을 고르듯 설설 빗질했다. 해보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손길이었다. 개를 기른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토도 선배가 빗어주는 대로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라키타는 얼굴을 구겼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니들 평소에 어떻게 사냐.”


   마나미는 눈을 굴렸다. 움- 하면서 입술을 내밀었다가,


   “내가 개처럼 살고, 토도 선배가 나를 길러줘요.”


   라고 말했다.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걔가? 라고 묻자 마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파란색이 일렁였다. 의외였다. 머리가 아파왔다. 아라키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성급하게 들이켰다. 머리가 띵해 얼굴을 찌푸렸다. 아라키타는 제 앞에서 그의 이야기를 하던 토도를 떠올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아라키타는 툭, 던지듯 말했다.


   마나미의 대답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추하건데, 저번에 만났을 때도 토도는 마나미를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답지 않게 힘들어 보였던 모습이 이해가 갔다. 혼자 짊어지는 버릇은 여전했다. 고등학생 때에 비해서 전혀 자라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괜히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한숨을 내쉬자 소라가 저를 바라보았다. 아라키타는 개에게 애써 웃어 보이고, 다시 제 앞에서 천진하게 놀고 있는 마나미를 바라보았다.

   아라키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 안은 온통 개털 천지였다. 정리하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온다’고 했을 때 거절해야만 했다. 삼일간의 짧은 전지훈련 후, 이틀간 휴가를 받아 다행이었다. 너만 없었으면 소라랑 해변 산책을 했을 거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마나미는 그래요? 라고 물어볼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사차원 신기해 군과 어울리는 건 언제나 큰 체력을 소모했다. 

   그가 마나미와 함께 하고 있다는 건 의외였다. 소라를 보내고 조금 외로워하는 것 같았지만 별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주어진 휴가는 두 달이었고, 유기견을 주워 돌봐주는데 한 달을 썼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한 달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달도 순식간에 지나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다리야 거의 나았다지만 일본에서의 시간을 본가에 들르는 게 아닌 마나미를 위해 쓰고 있는 게 이상했다.

   토도 진파치의 최종 학력은 대학교 중퇴였다. 카나가와에서 열린 힐클라임 레이스에서 아주 ‘우연히’ 외국 스카우터의 눈에 든 탓이었다. 하지만 그 속내는 따로 있었다. 그는 결국, 사랑 때문에 도망친 것이다. 속이 쓰렸다. 침전하는 찌꺼기마냥 답답했다. 아라키타는 어느 늦겨울의 토도를 떠올렸다. 그 애는 시린 눈밭처럼 울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다가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덮었다.

   그 잘난 입도, 쓸데없는 말을 필요 없이 많이 하는 성격도 모두 접었다. 프라이드 또한 보이지 않았다. 토도는 한참을 울었다.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진정을 하려다가도 하지 못한 채 숨을 억지로 들이켰다. 히끅거리는 딸꾹질 소리가 유난히 조용한 겨울에 섞여 들렸다. 아라키타가 할 수 있는 건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토도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울상이 돼서 중얼거렸다.

   시간은 한 순간에 과거로 돌아가지 않아. 나는 나 나름대로 마나미를 사랑했어. 우리는 사랑했다가, 헤어졌고. 그것뿐이야. 그렇지만 일본에 있으면 너무 괴로워지니까 도망가는 것뿐이지. 포기하는 거야. 일말의 가능성까지 모두 지워버릴 수 있도록. 나답지 않게 약한 소리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럴 때도 있어야지. 하늘은 나에게 세 가지를 주었지만,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안 주신 모양이야.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삿포로에 다녀왔다던 그는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처럼 굴었다. 그는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그림자는 과거에 침전된 채 그의 발뒤꿈치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소복소복 내린 눈을 소리 없이 밟는 그는 그저 한없이 투명한 색이었다. 여름의 짙은 색채와는 다르게, 하염없이 엷은 색이었다. 아라키타는 토도에게서 그런 느낌이 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아라키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선배 되게 못생겼네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야! 하고 소리치자 마나미는 경쾌하게 웃었다. 마나미가 뒤집어, 라고 하자 소라는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영리하네요, 라고 말하자 니 선배가 길들인 거야. 라고 대답했다. 마나미는 흐음~ 하고 대답하더니 빠지는 털이 신기한 듯 웃었다. 큰 빗으로 슥슥 빗어 내리자 다시 털이 뭉텅뭉텅 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빗질은 섬세하고 상냥했다.

   둘 사이의 관계에 타인이 간섭할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아라키타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건 그 토도 진파치가 마나미 때문에 해외 도피를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다 나으면 돌아올게 라고 했으니 분명 지금도 그걸 의식하면서 달리고 있을 터였다. 발목이 다치고 무리했던 것도 마음 한 켠에 마나미가 남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라키타는 멋대로 추측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 토도 너무 괴롭히지 마.”


   그 말에 마나미는 고개를 들었다. 아라키타는 표정을 잔뜩 구겼다. 마나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음- 하고 망설이다가 웃음을 거두었다. 드물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산 정상을 앞에 두고 집중력을 올릴 때처럼 소름이 돋았다. 갈 곳 없는 손은 소라를 빗고 있었다. 그는 꼬리를 손 위에 올리고 슥슥 빗질을 했다. 여전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아라키타는 마나미의 머리카락을 그런 식으로 쓰다듬는 토도를 떠올렸다. 입 안이 썼다.


  “내가 토도 선배랑 같이 있는 게. 괴롭히는 게 되는 건가?”


   마나미가 물었다. 그는 아라키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라고 돌아온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토도는 그에게 어디까지 말했을까. 그는 토도와 자신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전혀 모를 것 같았다. 상대방의 말이 어디로 움직이는 지 볼 수 없는 장기를 두는 기분이었다. 아라키타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각이 이리저리 엉켜 풀리질 않았다. 

   마나미와 만난 첫 날을 떠올렸다. 그 때도 그는 아라키타에게 곤란한 것들만을 물었다. 자기는 기억이 없는데 토도 진파치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 왜 안 알려주는 게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당신이 좀 알려달라. 나는 더 가까이 가야하니까. 그 때도 저런 또랑또랑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아라키타가 왜 그렇게 알려고 하느냐 묻자, 그는 “반한 것 같다.” 라고 말했다. 말을 ‘오늘 밥 먹었어?’를 묻는 것처럼 간단하게. 

   한 번 반했던 상대에게 다시 반하는 건 의외로 있을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저 둘의 관계는 조금 비틀려 있었다. 토도는 맺고 끊는 걸 잘 하는 사람이다. 제 경계 안의 사람에게 조금 무른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단호하다. 아라키타는 턱을 괴었다. 왜 괴롭히는 게 되는 데요? 마나미는 다시 질문했다. 아라키타 몰라. 하고 말했다. 마나미는 얼굴을 찌푸리고 개털을 빗었다.


   “선배들은 원래 다 그래요?”

   “알면 다쳐서 그래.”

   “나도 알거 다 아는 나이인데.”

   “기억도 없는 주제에 까불기는.”


   마나미는 흥이다. 라고 말하면서 소라의 귀 뒤를 쓸었다. 그 부분의 털을 정리해주고 골라주자, 개는 기분이 좋은 듯 꼬리를 붕방방 흔들었다. 꼬리 부근의 털이 푸르르 날렸다. 토도 선배가 왜 귀여워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네요~ 마나미는 제법 경쾌하게 말했다. 아라키타는 영리하고 귀엽지, 라고 자랑했다. 마나미는 그의 말에 호응해주는 대신, 매일 자기 전에 토도 선배가 사진을 봐요, 라고 대답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토도의 생활은 단촐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산책을 한다. 요 며칠 새에는 마나미가 끼면 사이클링을 한다. 요즘은 따라가는 거에 익숙해지긴 했는데 날개를 어떻게 꺼내는지 모르겠다면서 마나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라키타는 그의 감각적인 주행을 떠올렸다. 확실히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밟는 녀석이니, 기억이 없다는 건 치명적일지도 모른다.

   어떤 방식으로 페달을 돌리는지 잊어버린다. 이런 식이라면 다음연도 시즌에 복귀하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프로에게 멈춤은 치명적이다. 아라키타는 제 손마디를 쓸었다. 그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것 같은 클라임을 한다. 그 타이밍은 감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아라키타는 뒷목을 쓸었다. 

   재활, 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곧 그것이 마나미가 원하는 일인가, 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나미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했다. 자전거 계속 타고 싶냐? 아라키타는 퉁명스럽게 질문했다. 마나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였다. 왜? 라고 묻자 마나미는 별달리 고민하지 않고


   “토도 선배를 앞지르고 싶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맹랑한 소리였다. 공식전의 기록에서도 마나미는 한 번도 토도를 이긴 적이 없었다. 아라키타는 대학 레이스를 떠올렸다. 팀에 클라이머가 자신 하나밖에 없으면서도 마나미를 앞지르기 위해서 전력으로 질주하던 토도를 반추했다. 그들 사이에는 남이 끼어들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짙고 깊은 감정이었다. 아라키타는 다시 음료를 마셨다. 침묵이 어색했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마나미는 물었다. 소라는 컹컹 짖었다. 마나미는 리트리버의 황금빛 털을 만지다가, 다시 빗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라키타는 토도가 유럽으로 간 이후에 한 번도 무딪힌 적이 없으니까,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이상론을 내놓았다.

    마나미는 그 말이, 허무맹랑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예전의 마나미 산가쿠고, 지금은 다르잖아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의 목소리는 답답함과 약간의 억울함을 담고 있었다. 아라키타는 머쓱하게 다시 목을 축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고 사괄 하니 마나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라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토도는 어드바이스를 해줘? 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미의 정수리에 튀어나와 있는 바보털이 흔들렸다. 불안정하고 불안했다. 뭉쳐지지 않고 흩어지는 가루눈이나, 여름철 아스팔트 위의 아지랑이나, 혹은 발치에 미처 닿지 않고 사라지는 파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 상태의 그를 어떻게 잡아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라키타는 그들의 서사에서 철저한 외부인이었다.


   “토도 선배는.”

   

마나미는 눈을 감았다. 그는 무언가를 이미지 하듯 가만히 있다가,


   “언제나 자유롭게 달리라고 하는데”


   감았던 것을 뜨면서 불만이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마나미는 소라를 끌어안았다. 불안한 듯 숨을 내쉬었다.


    “목표가 있으니까 자유롭게 안 되는 기분이에요.”


   출발하기 전에는 분명 사이클링을 하자고 하면서 막상 시작하면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멀리 뻗어나간다. 오르막이 되면 산책을 하는 멍멍이처럼 신나는 지 저 앞서 나간다. 그래서 그걸 쫓아가기 위해선 열심히 밟고 있긴 한데, 그걸 잡아보려고 너무 몸에 힘이 들어간 나머지 날개를 꺼낼 수 없다. 자칫 동화처럼도 들리는 이야기였다. 아라키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존심 덩어리네, 라고 말하자 마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산책을 끝내면 아침을 한다. 밥을 해주는 건 거의 토도며, 자신은 설거지 정도를 돕는다. 그런 식으로 오전을 비우고 나면 연락이 오고, 토도는 반장과 집에 어서 연락하기를 마나미에게 권유하고 병원에 간다. 핸드폰은 대부분 마나미가 쥐고 있는데, 반장에게 연락하면 바로 잡혀갈 것 같아서 안 하고 있다. 요즘은 간간히 ‘산가쿠를 당신이 데리고 있나요?’ 라는 문자가 도착한다.

   토도 선배가 볼 것 같아서 일단은 지우지만 좀 애매하다. 그렇게 토도가 병원에서 돌아오면 둘이서 저녁을 먹는다. 산책을 가고 싶을 땐 산책을 가지만 텔레비전 같은 게 없어서 시간이 좀 느리게 흐른다. 가끔은 선배가 물리치료실에서 배워왔다던 스트레칭을 도와주고 다리를 주물러준다. 그런 식으로 애교를 부리다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고 토도는 빨리 자는 편이라서 방에 먼저 들어간다.

   문을 잠궈 놓는데 베란다 쪽은 잠궈 놓지 않는다. 그래서 자고 있을 때 침대에 들어가서 같이 잔다. 혼낼 법 한데 혼내지 않는다. 아무튼 토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있다. 좀 더 밖을 돌아다니고 싶은데 뭔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은지 사이클링도 산책도 낮이나 아주 깊은 밤에나 하고 다녀서 낮에는 좀 피곤하다. 마나미는 하루 일과를 요약해서 말했다. 그는 소라의 턱 밑을 긁었다. 앉아봐! 라고 하자 소라는 몸을 일으켰다.

   리트리버의 가슴털을 빗어주는 마나미를 보며 아라키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문제 있는 삶인가? 라고 묻자 그는 집에 연락을 안 하는 건 확실히, 큰 문제라고 대답했다. 그런가? 마나미는 다시 되물었다. 천진한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아라키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미와 만나는 건 기본적으로 토도에게는 ‘비밀’이었다. 이중 스파이가 된 기분에 답답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급하게 연락한 거냐.”

   “응. 오늘은 토도 선배가 『하야토』를 만나러 가서요.”


   핸드폰 못 쓰는 날이니까. 마나미는 방긋방긋 웃었다. 그는 아라키타가 이야기해주는 자신에 대한 정보들을 들어도 기억이 확- 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라키타는 자신이 그에게 말해준 정보들을 떠올렸다. 너는 클라이머고. 사차원이고, 세상을 좀 더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남자였다. 하코네 학원 사상 초유의 1학년 레귤러였다. 매년 전국체전의 파이널리스트였던 강자였고, 지금은 프로 선수를 하고 있다.

    전부 피상적인 것들이었다. 마나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볼에 볼을 비볐다. 훈련? 이라고 묻자 아라키타는 그런 버릇이 있었다고 말했다. 마나미는 개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개는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더니 꼬리를 흔들며 마나미의 상체를 눌렀다. 마나미는 그의 등을 두 손으로 쓸어 털 결을 엉망으로 해놓았다가, 다시 쓱쓱 결을 맞추어 쓸어주었다.


   “멀어지는 이유가 궁금한 건데. 왜 그건 말 안 해줘요?”

   “그건 토도한테나 물어봐.”

   “그러다가 집에서 쫓겨나면 어떡해요.”

   “그런 걸 걱정하는 놈이 날 만나러 오냐.”

   “왠지 아라키타 선배는 나 곤란하게 할 사람이 아닐 것 같아서.”


   믿는 건지 믿지 않는 건지 애매한 말에, 아라키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했어. 라니까 거짓말이라는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마나미는 예전부터 감이 좋은 남자였다. 이런 사차원이랑 최대한 곤란하게 엮여버렸다. 아라키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개를 떠맡아서 이런 쌩고생을 하는 거냐고 넋두리를 내뱉었지만, 마나미는 그럼 토도 선배에게 일본에서 휴가를 보내라고 권유하지도 말았어야죠. 라고 말했다. 

   기억을 잃기 전에나 후에나 당돌한 놈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자, 그는 제 앞에서 박수를 두 번 쳤다. 소라는 그것이 놀자는 신호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마나미는 소라에게 다시 ‘앉아!’ 라고 했다. 훈련이 잘 된 리트리버는 앉은 채로 꼬리를 흔들며,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나미가 뽀뽀! 라고 하자 개는 그의 볼에 주둥이를 부비러 몇 걸음을 다가왔다. 소라는 사랑스러운 개였다. 

   그들이 노는 것을 보고 있던 아라키타에게 마나미는 말을 걸었다. 


   “그래서, 알아달라는 건 알아봐주셨어요?”

   “부탁하는 태도가 싸가지 없네.”

   “예전에 어떻게 했을지 정말 기억이 안나서.”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거야 짜샤.”


   아라키타는 마나미를 째려보았다. 너 때문에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물었다. 사설탐정이 된 것처럼 수상하게 남 뒤나 캐고 다니고 있다면서 약간의 허풍과 과장을 섞어서 투덜거리자 마나미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잘못한 게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렇게까지 혼내려던 건 아니었다. 마나미는 딴청을 피우듯 소라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 아라키타는 그제야 화를 낸 건 아니야, 라고 말했다. 마나미는 자신이 부탁한 것을 알아보았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는 나름대로 간절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깊은 물처럼 잔잔했으나, 마치 그것처럼 어두웠다. 아라키타와 첫 번째 만난 날. 마나미는 자신이 왜 그 여름 비 내리는 날 하코네 산을 올라갔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기억을 찾으려면 거기부터 마주해야 할 것 같다는 말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조사하기엔 까다로운 일이었다. 마나미의 실종은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구체적인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오는 날’ ‘하코네 산’이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들이었다. 아라키타는 마나미에게 도바시랑 쿠로다를 기억하는 지 물었다. 마나미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게 인간 사회에 대한 것들과 일반적 지식이라고 다시 설명했다.

   아라키타는 그래, 하고 짧게 말하고선 앞으로 말할 내용은 그들이 알려준 것이라 덧붙였다. 그는 도바시와 쿠로다가 이 일에 대해서 한탄하듯 말하던 걸 떠올렸다. 그들은 미야하라에게서 같은 부탁을 받았지만 이 마나미가 비오는 날 산을 타러 올라간 이유에 대해선 전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둘은 나름대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들은 마나미가 사라지기 이전에 같이 있던 유이한 사람이었다.


   “니가 실종되기 전 상황 밖에 모르지만.”

   “으음~”

   “그래도 들을래?”


   아라키타의 말에 마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라를 꼬옥 끌어안았다. 어두운 남색 티셔츠에 소라의 털이 잔뜩 묻었다. 개는 마나미의 울적함을 알았는지, 꼬리를 흔들었다. 아라키타는 그거 다 떼고 가라. 그 녀석이 보면 또 신경 써. 라고 말했고 마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라는 마나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볐다. 하지만 마나미는 개가 아닌 아라키타를 보고 있었다. 아라키타는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생각했다.



   그 날. 마나미는 쿠로다와 도바시를 만났다.

   쿠로다는 하코네 졸업생 모임의 간사였다. 도바시는 가끔 부간사인 이즈미다 대신, 쿠로다를 도와 모임 참석 명단 정리를 돕곤 했다. 이즈미다가 요즘 졸업 논문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도바시 이외에는 할 사람이 없기도 했다. 유토는 일을 시키면 제대로 하면서도 입은 뺀질거리고 아시키바는 명단 정리보단 졸업을 해야 했으며, 마나미는 트러블의 중심이었으니까 이런 부분에선 빠져주는 게 편했다.

   하코네학원 자전거 경기부 졸업생이 모이는 규모는 그때그때 달랐다. 『왕자』라고 불리는 강호교란 결국 집단에 소속감을 가진 OB들이 많기 마련이었고, 이는 전체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큰 모임이 년에 두 번 정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코네학원 자전거 경기부는 각 기수별로 연락을 돌려 그걸 취합하는 것 보다는 한 번에 정리해서 초대장을 보내는 게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시즌마다 쿠로다는 졸업생들의 연락처를 받아 편지를 발송하는 일을 해야 했다. 혼자서는 못 할 양이라 그는 친한 후배들을 불러 초대장을 만들었다.

   쿠로다 유키나리의 바로 위 기수, 즉 아라키타 3학년 시절의 레귤러와 쿠로다 3학년 시절의 레귤러만 모이는 작은 모임도 분기별로 한 번씩 있었다. 열 명이나 되기 때문에 미리미리 참석자 명단을 정리하고 초대장을 보내야 했다. 물론 분기별 모임이래봤자 봄부터 가을까지는 자전거 경기 시즌에 걸리기 때문에, 정작 초대장을 돌려도 쿠로다 기수의 레귤러만 모이곤 하는 작은 모임이었다.

   그렇지만 올해 여름은 달랐다. 국내에 남아 프로 레이싱팀의 매니저로 취직한 아라키타를 제외하고는 해외에 있는 바로 위기수 선배들이 귀국한다는 비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있는 후쿠토미와 토도, 이탈리아에 있는 하야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절호의 찬스였기에 이즈미다와 쿠로다는 시기를 잘 잡아 전체 모임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선배들이 보고 싶었다. 

   유토는 하야토 군이 8월에 휴가를 좀 길게 받아 이 주 정도를 일본에 머무른다고 했고,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후쿠토미도 여름휴가를 받아 귀국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날 카페에서 도바시와 쿠로다는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초대장을 쓰기 위해 아라키타에게 후쿠토미가 귀국하는 지를 물어보자, 어째서인지 후쿠토미의 일정은 완전 미정이고, 대신 토도가 귀국한다는 말을 들었다. 

   두 사람은 그럼 토도 선배에게도 초대장을 쓰는 게 좋은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다고 했다. 아라키타는 이 말을 하면서 마나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헤에, 하고 짧은 추임새를 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갈 기억했단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트러블메이커인데 초대장을 원래도 받고, 토도 선배한테 초대장은 안가는 거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라는 질문에 아라키타는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야토는 토도와 친하다. 하야토가 초대장을 받았는데 토도가 받지 못하면 분명 이야기가 갈 것이다. 하지만 토도에게 보낸다면 마나미가 문제다. 마나미는 의외로 선후배를 잘 챙기는 타입이었고, 모임에도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토도와 마나미를 한 술자리에 묶어 놓는다면 모임 분위기가 개판이 될 지도 모른다. 도바시와 쿠로다가 생각하기에 마나미는 토도를 약간은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야 잘 따랐지만 토도의 프로 데뷔 이후에 마나미는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두 사람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토도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에 대해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째 그 카페에서 마나미를 마났다. 물론 결론은 토도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토도가 답신을 주기 전에 참석자 확정 명단을 전체에 돌리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나왔다. 선배보다는 후배, 혹은 동급생에게 마음이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도바시는 글씨를 잘 쓰는 편이 아니었고 쿠로다 또한 도긴개긴이었다. 그래서 초대장 만들기는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이었다. 마나미는 카페의 뒷문으로 나타났는데, 우산이 없어 비를 피하러 왔다고 했다. 그의 손에는 우산이 없었다. 자전거 거치대에는 LOOK이 걸려 있었고, 그들은 마나미와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마나미도 글씨를 잘 쓰진 못하는 편이라 도와주진 못했지만, 세 사람은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한참을 같이 있었다고 했다.

   초대장을 모두 만들기 전에, 마나미는 갑자기 가야할 곳이 생각났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쿠로다는 우산을 줬지만 그는 나갈 때 그 우산을 카운터에 맡기고 나갔다 했다. 쿠로다는 그 때 LOOK을 끌고 곧장 산으로 올라간 것 같다고 했다. 그 날은 장대비가 내렸다. 그 카페에 가볼 수 있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마나미가 물었고 아라키타는 고개를 저었다. 쿠로다가 말한 카페는 아라키타도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하코네 시내에 있는 그 카페는 토도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외관은 나무로 둘렀는데, 흰 페인트와 연두색 페인트를 물에 개어 연하게 발라 제법 예쁘게 지은 건물이었다. 물양갱 디저트나 과일 타르트가 제법 맛있는 집이었고, 아라키타 세대의 레귤러들이 연습이 끝나고 우르르 몰려가던 곳이었다. 하코네 산과 은근히 가까워서 학교를 오가기도 좋은 곳이었다. 전철을 타면 나름 가깝다지만 토도와 마주칠 것도 같았다.


   “토도 그자식이 안 간다는 보장이 없지.” 

   “그건 그러네요.” 


    나 자택 경비견이었지. 그런 소리를 하며 마나미는 어깨를 추욱 내렸다. 소라는 꼬리를 흔들었다. 내가 기억 찾는 걸 토도 선배가 싫어할까요? 마나미는 문득 물었다. 아라키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괜히 아메리카노로 타는 목을 축였다. 마나미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시선에 꿰뚫리는 느낌이 눈을 깔라 말했지만 그는 웃기만 하지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언젠가의 토도는 마나미의 시선을 ‘햇살’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정수리 위에서 내리쬐는 여름 뙤약볕 같아서 맹목적이고 맹렬하다는 말을 떠올리며 아라키타는 시선을 돌렸다. 쳇, 하는 추임새에 소라가 그를 쳐다봤다. 기른다면 이런 온순하고 착한 리트리버가 좋지, 사람새끼를 거두는 건 영 아니었다. 아라키타는 토도의 취향이 매우 비틀려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는 잠시 적막처럼 고요하다가,


   “싫어하는구나?” 


   라고 말하는 마나미의 목소리에 깨졌다.


   “나는 걔가 아니라 모르겠다.”


   아라키타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애초에, 아라키타는 토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완결적인 사람이다. 한 번 잘라낸 것은 뒤를 돌지 않는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며 앞으로 강건하게 나가는 남자다. 이런 남자의 세계를 마나미 산가쿠라는 의외성은 계속, 계속 흔들고 있었다. 예전의 마나미도, 지금의 마나미도 그러했다. 아라키타는 자신이 알고 있는 토도를 곱씹었다.

   토도 진파치는 무책임하게 도망갈 남자는 아니었다. 특히 대학을 마치기 전에, 부모님과 누나조차도 출국 일주일 전쯤에야 알 정도로 갑작스럽게? 아라키타가 아는 토도는 그렇게 대책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서두른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치밀하고 빈틈없이 계산해서 달리는 토도의 방식은 그의 삶에도 녹아 있었다. 그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마나미 산가쿠가. 그와 함께 있었던 일본이. 그와 함께 있었던 사계의 모든 부분이.

   그가 정말로 싫어서 떠났다면 기억을 잃은 다음에도 거두지 말았어야 했다. 완결을 내고 싶거든 기억을 잃은 마나미에게 볼 일은 없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기억을 잃기 전. 자신과 사귀었었던 마나미 산가쿠니까,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의 마나미에겐 잘 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미야하라의 번호를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그녀에게 연락을 해서 인계하는 것도 간단하다. 

   차라리 그러면 감정적으로 얽힐 필요가 없어 편리하다. 완결을 내고 싶을 때 낼 수 없다는 건 불편한 일이지만, 토도는 그 불편함 때문에 설익은 지금을 그르치지 않는 남자다. 오히려 더 얽히지 않게 배려했으면, 배려했지 이런 식으로 관계를 꼴 사람은 아니다. 이 상황에서 아라키타가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마나미 산가쿠는 토도 진파치의 세계를 무자비하게 흔든다.

   그렇기 때문에 토도는 평소에 안할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라키타는 솔직하게 대답하기 전에, 네가 토도를 꺼렸다는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마나미는 턱에 손가락을 올리고 으음- 하고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파란색 머리카락이 약간 흔들렸다. 여전한 바보털을 바라보다가 아라키타는 소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금빛 털을 가진 리트리버는 아라키타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갔다. 그는 괜히 소라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툭, 툭, 쓰다듬었다. 마나미는 우움, 하고 다시 고민을 하다가 메론 소다를 마셨다. 이해가 잘 안 가요. 마나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깊고 짙은 숨이었다. 마치 그들 사이에 생긴 감정의 골처럼. 그는 먼 창을 바라보았다. 창 밖의 하늘은 그저 한없이 파랄 뿐이었다.


   “귀여운 사람이던데.”

   “누가?”

   “토도 선배가.”


   마나미는 아라키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떤 점이?”

   “어떤 점이라고 말하면 잘 모르겠지만.”


   마나미는 부드럽게 웃었다. 풋사랑을 하는 청소년의 모습이었다. 아라키타는 몇 해 전의 마나미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었다며 선배들에게 보고하러 온 ‘막내’는 토도를 볼 때 마다 꼭 저렇게 웃었다. 부드럽고 상냥하게. 산 정상에 부는 산들바람과, 초여름의 햇살처럼. 아라키타는 그들의 상황이 아이러니하다가고 생각했다. 그는 짙게, 숨을 내뱉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던데.”


   운명이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다. 그러기에 삶은 그 의미를 갖는다. 아라키타는 짜증이 난다는 듯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반했냐? 라고 퉁명스럽게 묻자 마나미는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챈 순간 사랑하고 있었어요, 라고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티끌 한 톨의 거짓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답답한 일이었다. 습기가 가득 차 있는 일본의 여름 같았다. 숨을 내쉬고, 내쉬어도 몸에 들어있는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았다. 피우지 않는 담배가 고팠다. 아니, 이제는 정말 피워도 될 것 같았다. 진짜로 사랑하느냐는 상투적인 대사를 내뱉었다. 마나미는 여전히 고민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랬다. 아라키타가 기억하고 있는 그는 언제나 토도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이 미련의 이름이던, 사랑의 이름이던간에. 

    속이 답답했다. 누군가가 명치를 누른 것 마냥 울렁거렸다. 평지에서 멀미를 하는 것 같아 아라키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을 가는 줄 알고 소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담배를 피고 오겠다고 말했다. 마나미는 금연을 권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이 오글거리거나 이상하느냐 물었다.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들여다보다가 아라키타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감정은 타인이 재단할 수 없다. 평가할 수도 말릴 수도 없다. 스스로가 페달을 밟고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레이스와 같다. 이런 전력질주를 저가 어떻게 말릴 수가 있을까. 아라키타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는 마나미에게 다가갔다.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후배의 머리카락을 마구마구 흐트러트렸다.


   “사랑 같은 상투적이고 질척이는 거 원래 싫어해.”


   라고 말하자 마나미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가 떠안고 있는 불안감을 알 수 없다. 토도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아라키타가 정확하게 짐작할 수 없듯이. 둘 사이의 일은 둘이서 해결을 해야만 했다. 그는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탔을 때를 반추했다. 흔들리고 넘어지더라도 페달을 밟는 동안엔 남이 도와줄 수 없다. 비틀거려도 결국 중심을 잡는 건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등을 밀어줄 수는 있다. 불안하냐? 아라키타는 다시 질문했다. 마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도 선배는 어느 순간 휙, 하고 사라질 것 같아요. 자전거를 탈 때처럼 소리 없이 가속해서, 저 너머로 슉- 하고. 마나미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를 쭉 펴서 앉았다. 아라키타는 그의 바보털을 꾹꾹 누르다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듯 쓰다듬었다. 마나미는 머쓱한지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선배는 사랑을 좀 하지 그래요?”


   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나 행복하고 두근거리는데. 마나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 속에 악의는 없고 다만 설렘만이 들어차있기에 아라키타는 그저 아- 예. 하고 말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첫사랑이냐? 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의 마나미도 마찬가지였다. 알에서 깬 아기새가 어미새를 따라가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마나미 산가쿠의 처음은 언제나 토도 진파치인 모양이었다.

   얄궂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 강제력이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아라키타는 아파트 문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개털을 치워 놓으란 말에 마나미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 상쾌한 목소리와는 달리 아라키타의 속은 베베 꼬여있었다. 아라키타는 편의점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의 ‘내려감’ 버튼은 끈적거렸다. 그는 제 검지를 만지작거렸다. 나중에 토도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없이 답답하기만 했다. 해소할 수 없는 일본의 더위처럼. 



***


   “뭔가 차도, 소리 없이 가속하는 느낌이네.”

   “와하하, 하야토! 내 주행은 도로조차 잠들게 하지.”


   토도는 경쾌하게 웃었다. 하네다 공항을 빠져나가는 길은 묘하게 한산했다. 간만에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는 하야토의 제안에, 바로 하코네로 가는 것 보다는 국도를 타고 빠졌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다시 탐색했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삐삐 울리는 것을 무시했다. 하야토는 뭔가 이 상황이 웃긴 듯 키득키득거렸다.

   뒷좌석에는 큰 캐리어 두 개와 서벨로를 넣어 두었다. 그는 꽤나 짐이 많았다. 하야토는 리들리를 가지고 왔으면 타자고 했을 텐데, 라면서 아쉬워했지만 발목을 핑계로 그건 미뤄두었다. 하야토는 창문을 열었고 토도는 에어컨을 껐다. 자연을 무대로 달리는 사람이라 그런지,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게 답답한 모양이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더위와 함께 미지근한 바람이 밀려왔다.


   “진파치랑 이렇게 만나는 것도 간만이네.”

   “언제나 대회장 정도에서만 만났으니까.”

   “그렇지? 만나서도 한적한 시골 카페였고.”

   “잠시 만나다가 헤어지고.”


   열린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하야토는 부드럽게 웃었다. 프랑스의 여름과 다르게 일본의 여름은 꿉꿉하고 끈적였다. 하지만 그게 꼭 고등학교 때의 ‘인터하이’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 같아 나쁘진 않았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먼 곳을 쳐다보았다. 길게 뻗은 도로 너머에 보이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그저 좋았다.

   뭔가 노래를 틀고 싶은데, 라고 말하자 토도는 그럼 문을 닫아야한다고 대답했다. 바람을 맞지 않는 건 좀 싫어서, 하야토는 어쩔 수 없다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토도는 부드럽게 웃었다. 웃는 모습은 여전했다. 고등학생에서 전혀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바뀐 부분이라고 하면 길게 기른 머리카락 정도가 아닐까. 하야토는 그의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진 그것을 보다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토도는, 감추는 데에 능숙하다.

   하야토는 며칠 전 걸려온 전화를 떠올렸다. 후쿠토미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가 먼저 연락을 하는 건 드문 일이라 들뜬 마음으로 받았더니, 후쿠토미는 다짜고짜 “요즘 토도가 잘 지내는지 아느냐”, 고 질문했다. 대답을 고민할 질문은 아니었다. 연락을 할 때 마다 토도는 언제나 발랄하고, 상냥했다. 부상도 별거 아니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간간히 재활하고 있는 사진을 보내줄 때도 있었다. 그는 수면水面만큼 잔잔했다.

   진파치는 일본에 돌아가는 걸 조금 걱정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잘 지내는 것 같다, 고 대답하자 후쿠토미는 아 그래. 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뭔가 석연찮았다. 뒷맛이 찝찝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야토는 토도가 자전거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던 때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느냐 질문했더니 아라키타로부터 수상한 전화가 왔다는 말이 따라왔다.


   ―수상한 전화?

   ―아. 마나미랑 헤어졌을 때, 토도가 어땠는지를 묻더군.


   확실히, 수상했다. 이상했다. 왜 묻는 지 질문했을 때 아라키타는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라고만 대답했다고 했다. 리빌딩 중이라 여름휴가를 길게 쓸 수 있는 하야토의 팀과는 달리, 후쿠토미의 팀은 아직도 시즌이었다. 이번에 일본에 가면 토도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봐 달라는 후쿠토미의 부탁을 하야토는 거절할 수 없었다.

   팀 분위기도 뒤숭숭할텐데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는 후쿠토미에게, 하야토는 자기도 언제나 토도를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며 애써 달랬다. 토도가 생각보다 차가운 남자인 것처럼 후쿠토미도 생각보다 여린 구석이 있었다. 그는 그를 한참 달래다가 전화를 끊었었다. 그는 토도가 집을 팔고, 아예 프랑스에 정착할 생각으로 돌아오는 게 불안하다고 했다. 그 말에 하야토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에 열병처럼 앓은 첫사랑이 생각보다 무겁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끝맺지 않고 감행한 도주는 잡히기 마련이다. 토도는 지금 ‘도피한 값’을 치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야토는 뒷목을 쓸었다. 게다가 오늘, 그에게 말해주어야만 하는 소식도 있었다. 어떻게 운을 때야할 지 몰라 창문 밖을 바라보자, 토도는 덥지? 라고 경쾌하게 물었다. 하야토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휴가도 며칠 안 남았네.”

   “슬슬 비행기표 끊으려고.”

   “너무 늦게 끊는 거 아냐?"

   "그런가?"

   "...더 안 있어도 괜찮아? 집은 팔렸어?”

   “음, 아직 보는 사람만 있지만, 그래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야토는 손마디를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물었다.


    “프랑스에 좋은 사람이라도 숨겨 놨어?”

    “그건 아니지만.”


    토도는 머쓱한 듯 볼을 긁었다. 그는 능숙하게 기어를 바꾸었다. 랜트카 업체에서 급하게 구했다던 오래된 차에는 클러치가 달려 있었다. 하야토는 그의 입에 과자를 넣었다. 토도는 땡큐, 라고 말하며 입을 오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뱉은 본인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엷은 숨이었다. 차는 완만한 커브를 돌았다. 이대로 국도를 돌아 바다 쪽으로 빠질 생각이었다.

   점심 메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풍경을 보았다. 자전거로 달리는 게 좋을 것 같은 평지였다. 하야토가 아쉬운 듯 먼 곳을 보고 있자 토도는 나중에 같이 달리러 오자고 말했다. 그는 눈치가 빨랐다.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도는 예민하고 섬세하다. 감추는 데에 익숙하다. 이런 그에게 타인이 해줄 수 있는 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혼자서 결론을 내고 혼자서 최선을 파악한다. 나름대로 이지적인 성격이었지만 그의 나쁜 버릇이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갑작스럽게 말을 얹는 것도 이상했다. 각을 재야하는데 어째 틈을 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야토는 자전거를 그만둔다고 선언하던 고등학교 3학년 말의 토도를 떠올렸다. 그것 또한 갑작스러웠다.


   마키시마의 영국행이 원인이었다.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제법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더 이상 빨라지기 힘드니까,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결론을 낸 이상 틈을 보이지 않는다. 하야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그는 눈을 굴리다가, 하늘 아래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그를 붙잡아 준 건 마나미였다. 그 때부터 둘은 서로 좋아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토도는 다시, 당연하게도 자전거를 탔다. 그가 졸업 전에 받은 앨범에 ‘그만두지 말아달라’고 적어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렇게 해결한 부분에 대한 힌트도,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도 알리지 않았다. 그게 자신의 약점이 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야토는 그의 이런 부분이 차갑다고 느꼈다.

   숨기는 것도, 밀어내는 것도 능숙하다. 사람과의 거리조절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가 드물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다. 도와줄 기회를 주지 않는 게 답답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슬럼프인 자신을 도와줬던 그에게 자신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른다. 하야토는 먼 곳을 보다가 바다다, 라고 중얼거렸다. 

    커브를 돌 때 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에는 빛이 잔뜩 고여 있었다. 파도는 결마다 반짝였다. 열어둔 창문을 타고 매미 우는 소리가 들어왔다. 이제야 귀국한 실감이 난다고 하니,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유럽의 풀벌레와 일본의 풀벌레 소리에 대해 이야길 하다가, 그래도 풍댕이는 싫다는 말로 대화를 맺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퍼지는 말소리가 꼭 고등학생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일본에 있으니까 좋아?”

   “음. 그러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어.”

   “진파치 답지 않게 미묘한 대답이네.”

 

   하야토의 말에 토도는 경쾌하게 웃었다. 그는 말하는 대신 속도를 올렸다. 창문을 통과하는 바람소리가 말소리보다 크게 울렸다. 이 화제에 대해서 말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그는 오늘 저녁에 아라키타를 만나는 게 어떻겠는가 제안했다. 마침 휴가라는 말에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스토모도 못 본지 한참 됐지, 라는 말을 하자 토도는 조금 기쁜 듯 웃었다.

   이왕 보는 거 일찍 봐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말하자 토도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대답했다. 전화 좀 해 봐, 라는 말에 하야토는 그의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에 달린 돌고래 모양 키링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연하늘색 레진과 반짝이 가루들을 넣어 만든 그것은 햇볕을 머금어 움직일 때 마다 표면이 자잘하게 빛났다.

   비밀번호가 뭐야? 라고 묻자 토도는 공오이구, 라고 대답했다. 하야토는 잠금을 풀고 그의 통화 목록에서 아라키타를 찾았다.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받지 않았다. 자나? 라고 묻자 토도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해안도로 옆으로 자전거 몇 대가 지나갔다. 자전거가 만드는 바람에 코끝이 간질거렸다.


   “뭔가 그립네.”

   “그렇지?”

   “같이 사이클링 갈래?”

   “발목이 아파.”

   “아직도?”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전력을 내기가 힘들어, 라고 말하자 하야토는 사이클링인데 전력을 낼 필요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토도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것도 그렇네. 라고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전거 가져오라고 하는 건데. 하야토는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쉬운 듯 말했다.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바닷가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생선구이 정식을 먹었다. 바다를 보면서 먹기에는 좀 간소한가 싶었지만 맛은 좋았다.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핵심적인 건 없었다. ‘산길’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직선과는 다른 경사도를 밟아 오르는 건 언제나 답답하고 힘들었다. 토도는 언제나 신에게서 ‘화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대화는 맴맴, 빙글빙글 돌았다. 탐색전을 하는 기분이었다.

   카페로 가면서 아라키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소라 산책시키나? 라고 중얼거리는 그에게 강아지 자랑을 해달라고 하니까 금새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핸드폰의 갤러리를 열어 한참을 내리더니, 그는 털이 풍성하고 예쁜 리트리버를 보여주었다. 그는 강아지가 제 꼬리를 잡기 위해 빙빙 도는 동영상을 틀어주며, 이렇게 귀여운 천사는 이제 아라키타의 집에 있다면서 제가 더 즐거워했다.


   “귀엽네.”

   “그렇지?”

   “응. 정말로.”


   야스토모는 왠지 고양이파라고 생각했지만. 음, 아라키타는 집에서 치와와 길렀었다고 한다. 경력직 집사인 셈이지. 집사라는 말은 고양이한테 쓰는 거 아니야? 으음, 그런가? 응. 그랬던 것 같아. 동생이 자꾸 자기를 집사라고 하거든. 유토가 고양이를 기른댔나? 응. 치즈 고양이래. 하야토는 한 손에 담길 만큼 작고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토도는 뭔가 그럴 것 같았다면서 끄덕였다. 

   오늘은 유토네서 자? 라는 말에 하야토는 응, 하고 대답하다가 문득 집에 가도 돼? 라고 말했다.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술을 한두 잔 나누다 보면 못할 이야기도 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하야토가 받은 휴가는 이주일이였다. 중간에 하루를 빼먹는다고 해서 유토가 서운해 하진 않을 것이었다. 대화의 경사도가 낮아진 느낌이었다. 하야토는 손마디를 만지작거리다가 토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응? 하고 되물으며 그가 고개를 올렸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이 승부를 걸 때 라고 판단했다. 하야토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진파치네 집, 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시선을 가만 바다 쪽으로 돌렸다. 토도는 한없이 펼쳐진 그 파랑에 예쁘다, 라고 중얼거렸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추리소설에서 이런 주인공들은 대부분 무언갈 감추고 있기 마련이었다. 토도는 먼 바다를 바라보다가, 유토, 라고 중얼거렸다. 응? 하고 묻자 그는 유토가 기다릴 텐데, 라고 말해왔다.


   “아하하, 정말?”

   “이젠 유토랑 사이좋잖아.”

    “그래도 서운해 하지는 않아.”


   형아가 늦게 온다고 해서 서운할 나이는 지났지. 나는 아직도 실감하질 못하지만. 하야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제 기억 속의 유토는 아직도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 1학년 정도의 나이인데, 어쩐지 귀국을 할 때 마다 커 있는 것 같고, 나이를 생각보다 더 먹은 게 신기하다고 말했다. 토도는 그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마나미를 떠올렸다.

   토도의 기억 속에서 고등학교 3학년, 혹은 대학교 1학년이던 그 애는 훌쩍 자라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자연스럽다. 그 애가 자고 있을 때 몰래 손을 대본 적이 있다. 손목 바로 위를 댔다. 손가락을 쫙 펼쳤다. 기억 속에서는 비슷했으나 마나미 쪽이 조금 더 컸다. 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그렇게 자랐는지 알 수 없었다. 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토도는 숨을 내쉬었다. 하야토가 까는 각설탕의 포장 소리가 귓 속을 그저 울렸다.


   “나, 진파치네 집 보고 싶어.”

   “별로 특별한 건 없는데.”

   “그 때 제법 열심히 지었잖아.”


   하야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작은 잔에 각설탕을 넣었다. 스푼으로 소리가 나지 않게 그것을 잘게 부셨다. 토도는 가만 생각했다. 야스토모도 부르자. 셋이서 맥주 먹는다던가, 그 근처에 예쁜 강이 있다면서. 하야토는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지은 다음에 한 번도 안 가봤잖아. 야스토모랑 후쿠도 안 가본 것 같던데, 늦은 집들이 같은 건 어때?  

  하야토의 목소리는 사근거렸다. 좋은 제안이었다. 이자카야에 가는 것 보다는 그게 피로도가 적다. 마시다가 지치면 적당히 퍼져 자도 괜찮다. 남의 손을 빌리기 싫어하는 저가 드물게 누나와 슈사쿠에게 폐를 끼치며 지었던 집이었다. 하야토가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팔리면 더 이상 보지 못할 집이기도 했다. 토도는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집에는, 마나미가, 있다. 하야토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었다. 갑자기 하룻밤을 쫓아낼 정도로, 매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놓아버린다면 멀리 갈 것 같았다. 이것 또한 애매한 상냥함이었을까. 애매하게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제 때 놓지 못해서 이런 결론에 도착하는 걸까. 토도는 눈을 깜빡였다. 하야토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상냥했다.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촉하지 않았다. 시간이 많다는 듯 느긋하게 굴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하지만 꿉꿉했다. 바람의 소금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무겁게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토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집에 손님 있어.”


    라고 대답했다. 하야토는 부순 설탕이 들어있는 잔에 에스프레소를 넣었다. 그는 스푼으로 설탕과 그것을 잘게 섞다가 누구? 하고 질문했다. 토도는 너 모르는 사람. 하고 대답했다. 텀을 주지 않았다. 말을 내놓는 데 고민하면 들켜버린다. 같이 놀기 힘든 사람이야? 진파치의 친구라면 나도 만나보고 싶은데. 그는 눈을 깜빡였다. 다음 거짓말이 필요했다. 토도는 친한 친구 가족이 놀러왔다고 말했다.


   “아, 슈사쿠 씨인가?”

   “미나미 선배도 있어.”

   “이 근처 산다고 하지 않았어?”

   “놀러왔어. 오늘 같이 바비큐 하기로 해서.”


   또 오늘 집 근처에서, 축제를 하거든 놀러갈까 하고. 유럽에서 와서 피곤하잖아? 토도는 가만 그의 눈치를 보았다. 유토랑 같이 가는 건 어때? 라고 묻자 하야토는 걔는 나랑 가는 것 보다는 다른 사람이랑 가는 걸 좋아할 거라고 대답했다. 묘하게 어색한 기분이었다. 나도 슈사쿠 씨 만나보고 싶은데. 하야토는 턱을 괴며 말했다. 널 자전거에 태운 사람이잖아. 진파치의 처음. 그의 말은 여름답지 않게 상냥했다.

   뜨거운 커피가 설탕에 녹아들었다. 토도가 괜히 머쓱해서 아이스 음료가 아니네, 라고 말하자 하야토는 이제 이렇게 마시는 게 습관이 되었다면서 설탕이 자잘하게 녹아든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야외 테라스 자리라 그런지 땀이 흘렀다.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다가, 미안. 하고 사과했다.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조른 것 같아서 미안한 걸.”

   “아냐. 내가 미안하지.”


   하야토는 상냥하다. 토도는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저 같이 애매한 사람이 아니다. 곤란한 거리는 애써 파고들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다만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며 한없이 걱정해줄 뿐이었다. 토도는 그의 거리감이 고마웠다. 커피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가 났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풍경이 흔들렸다. 유리와 구슬이 부딪혀 나는 맑은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나미가 보고 싶었다. 잘 있을까, 정도를 생각하며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피곤하지? 라고 묻자 하야토는 조금? 하고 대답했다. 유럽에서부터 곧장 날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토도는 괜히 그의 팀 이야기를 했다. 새로 선수 사준대? 라고 묻자 그는 클라이머를 구하지 않을까? 라고 대답하면서 빈 잔의 손잡이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거기도 클라이머를 구해?”

   하야토는 무언가 고민하듯,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적할래?”


   이제는 나랑도 달릴 때가 됐지? 주이치랑 너무 오래 달렸어. 진파치 너라면 우리 팀에서도 단번에 환영일걸. 하야토는 농담인 지 아닌 지 모를 말을 했다.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장난처럼 건넸다. 하야토는 잠시 카운터로 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더 주문해왔다. 그가 제 앞에 타르트타탕을 내려놓는 걸 보다가, 바다랑은 좀 안 어울리는데- 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진파치네 팀은 꽤나..... 의존하고 있더라.”

   “아. 성적 봤구나.”

   “산에서 좀 절망적이던데. 역시 진파치, 네가 없어서 그런가?”


   너희 팀은 끌어주는 올라운더가 많으니까, 산에서 클라이머가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어. 하야토는 뒷목을 쓸었다. 토도는 얼마전 후쿠가 드물게도 지친 기색으로 전화를 걸었다고 이야길 했다. 팀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잘 지내냐고 물었다. 한참 빙빙 돌다 꺼낸 이야기가 겨우 ‘잘 지내니’인게 묘하게 후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파이지 위의 아이스크림을 잘랐다.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진파치를 걱정하고 있는 거야. 다친 것도 그렇고, 갑자기 어떤 선택을 할 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라는 목소리는 느긋하게 닿았다. 집 안에서 맞는 여름 햇살 같은 목소리였다. 내가 그래? 라고 토도는 질문했다.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등학교 삼학년 말을 꺼내왔다. 갑자기 자전거를 그만둔다고 한다던가, 그런 완결된 부분이 나름 걱정되는 거야. 우리가 끼어들 자리가 없으니까. 라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너희 입시 때문에 늦게 말한 건데. 토도는 미간을 좁혔다. 예쁜 얼굴이 구겨졌다. 하야토는 아하하, 하고 난감한 듯 웃었다. 그래도 받아들이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 모르니까, 결론을 내기 전에 말해주는 게 좋지, 라고 말하면서 목을 축였다. 토도는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다른 화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클라이머는 누굴 구한대? 그는 사과조림을 포크 끝으로 찌르면서 질문했다.


   “알고 싶어?”

   하야토는 드물게 뜸을 들였다.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미.”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포크가 그릇에서 미끄러졌다. 사과조림 몇 개와 포크가 그릇에서 튀어 나무 테이블로 떨어졌다. 하야토는 새 포크를 그에게 건넸다. 마나미? 라고 재차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에서만 이야기 되던 거라 자기도 최근에 알았는데, 거의 도장 찍는 단계까지 갔다더라고. 최근 연락이 안 되어서 일본 가는 김에 소식 좀 알아달라고 하더라. 하야토는 부드럽게 말했다.


   “유럽으로? 간다고?”

   “일본보다야 해외 팀이 자전거타기에는 편하니까.”

   “정말? 마나미가?”


    토도는 재차 물었다. 말의 템포가 빨라졌다.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가 오갔다는데 자신도 자세한 것을 모른다고 해서야, 토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혀 몰랐어. 라고 말하며 고개를 도리질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나 때문에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산도 잘 타고, 부상 입은 적도 없어서… 기회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토도는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하야토는 꽤나 오랜 시간 고민했다는 말을 전했다. 이 말이 그에게 어떻게 닿을지 알 수 없지만. 

   테이블 위에 얹은 손이 떨렸다. 하야토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손 끝이 차갑고 딱딱했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워? 라고 묻자 토도는 다 끝난 일이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리고 평소의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전혀 몰랐다는 건 좀 충격이야, 라고 이어 말했다. 하야토는 그의 두 손을 제 두 손으로 포개어 덮었다. 그 때의 겨울과 비슷한 온도라고 생각했다. 계절은 정 반대임에도 불구하고. 하야토는 그를 달래듯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나미는 진파치랑은 연락 안 하잖아.”


    토도는 시선을 돌리다가, 그것도 그렇네, 라고 대답했다. 

   하야토는 그렇지? 라고 질문했다. 그는 이런 이야기가 불편한 지 다시 한 번 체크했다. 토도는 고개를 저었다. 유럽으론 안 올 줄 알았는데, 라고 말하자 하야토는 우리 쪽 스카우터가 삼 년 정도를 공들였다고 말하면서, 고집을 꺾는 데 힘들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실종일 줄은 몰랐다며 한숨을 푹 내쉬자, 토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기한 같은 건 있어? 라고 묻자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데려올 수 있으면 최우선으로 데려오자는 이야길 했고, 리빌딩 할 때 키플레이어로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일단 다음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에 본인이랑 연락이 안 되면 말짱 꽝이지. 애초에 몸에 이상이 있다던가 하면 잘 달릴 수 있을 지도 다시 검증을 해야겠고. 하야토는 담담하게 말했다. 토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들었다. 온 몸의 피가 싹 식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자신의 손에 쥐고 있으면 안 되는 아이였다. 눈을 깜빡였다. 마른 눈이 뻑뻑했다. 기한은 며칠 정도 남았어? 라고 묻자 하야토는 자신은 거기까진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타르트타탕을 작게 잘라, 사과조림과 함께 찍어 토도에게 내밀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토도는 그것을 받아먹었다.


   “우리 팀은 이번 시즌 공쳤으니까.”

   “웅.”

   “리빌딩은 꼭 할 거야. 한계가 있거든.”

   “응.”

   “겨울 전 까지는 뭔가 결정되지 않을까 싶고,”

   “그러네.”

   “그럼, 경기에서도 만날 수도 있잖아.”

   “응.”


   하야토의 시선이 닿았다. 눈을 마주치자 그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아?”


    파란색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토도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하늘이 세 가지를 주신 이 토도 진파치, 괜찮지 않을 리가 없잖아? 애초에 산에서 나를 이길 사람은 없고, 산에서 봐주거나 양보할 생각도 없어. 토도는 마치 준비해둔 것처럼 말을 내뱉었다.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진파치는 이렇게 자신만만했지, 라고 말하면서 손을 뻗었다.

   두툼한 손이 그의 머리카락 위로 닿았다. 땀이 났어, 라고 말하지만 하야토는 정수리에서 손을 때지 않았다. 그냥 쓰다듬어주고 싶어, 라는 이유를 붙여가면서 그는 손을 움직였다.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준 건 꽤나 간만의 일이었다. 칭찬해주는 거야? 라고 묻자 하야토는 그럴지도 모르겠다면서 웃었다.


   “왠지 그래야할 것 같았어.”

   “칭찬을?”

   “응. 뜬금없지만.”


    하야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에 마나미가 유럽에 못 올 거야, 라고 말하던 몇 해 전의 토도를 떠올렸다. 건드리는 순간 터져버리는 비눗방울 같은 그. 그 둘 사이에서 정확히 어떤 서사가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극복하고 디뎌낸 게 아닐까 싶었다. 하야토는 아라키타나, 후쿠토미의 걱정이 기우기길 바랐다. 

   토도는 약한 남자가 아니다. 강하고 단단하다. 과거를 후회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마나미의 일에 엮이면 생각을 극단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을 뿐이었다. 하야토는 여전히 그가,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참이나 토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아주었다. 

   고마워,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묘하게 힘이 없었다. 나중에 귀국하기 전에 한 번 쯤은 보여줘. 네 정원. 하야토가 그렇게 말하자,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심었다고 했었지? 라고 묻는 그에게 해바라기. 라고 대답한 토도는, 한참이 지나서야 능소화와 봉선화, 물망초 따위도 심었다고 말했다. 무슨 뜻이 있는 꽃들이야? 라고 묻기에, 토도는 그저 꽃말 없이 손가는 대로 막 심어버렸다면서 어설프게 웃었다.



***


   전력으로 달렸다. 다신 이렇게 뛸 수 없을 정도로 세게.

   야. 니 선배 지금 내 집 온댄다, 라는 말에 아라키타의 집에서 돌돌이를 들고 황급히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까봐 계단으로 내려갔고, 차가 다니지 못할만한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려 집에 도착하고 났더니 문이 단단히 잠겨 있었다. 토도의 귀가시간 전에 들어올 거였기 때문에 다시 들어갈 생각도 안하고 닫아버린 탓이었다.

   숫자를 때려 맞출까 싶었지만 알지도 못하는 걸 괜히 건드렸다가 경비업체가 출동하면 낭패였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이 그는 마당의 그늘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흰 원목으로 만든 나무 그네를 엉덩이로 밀면서 옷에 묻은 강아지 털을 땠다. 정원을 둘러싼 나무그늘 아래에 돌돌이 스티커들을 버렸다.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더위는 진하고 깊게 다가왔다. 마나미는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을 보고, 또 보고, 정원에 펼쳐져있던 그늘이 넓어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만 봤다. 토도를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지루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시간이 가질 않았다. 핸드폰도 없고 그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시간을 때울만한 소일거리도 없었다. 그는 해바라기에 지는 그늘을 바라보고, 봉선화에 앉은 벌을 보다가 간간히 그네를 밀었다. 한 번도 탄 적이 없는 지, 그네는 움직일 때 마다 찢어질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지루했다. 토도가 얼른 돌아오면 좋겠지만, 아라키타가 말하는 걸 들었을 땐 한참 있다가 올 모양이었다. 정원 뒤쪽에 있는 그늘에는 딱히 놀만한 것도 없었다. 강아지 장난감이라도 있으면 삐꼭삐꼭 소리를 내며 있을 텐데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옷에 묻은 리트리버의 털은 이미 다 때어냈다. 창문가에 있는 낮은 복층 때문에 집 밖의 단차가 높아, 안쪽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담장에 세워놓은 얇은 지지대를 따라 나팔꽃이 넝쿨을 뻗어 자라 있었다. 마나미는 그 꽃이 보라색으로 피던 것을 기억했다. 묘하게 토도를 닮은 색이었다. 새벽이 아니라 꽃잎을 말고 있는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마나미는 그네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한 숨 잠이라도 잘까 싶었다. 매미는 맴, 맴,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땅에서 발을 때고 몸을 기대자 그네는 한동안 끽, 끽, 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파란 하늘을 덮는 구름은 호젓했고, 느리고 완만한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체력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잠들면 깨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집 주변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다가, 토도가 정리해서 버린 전단지들을 발견했다. 오늘 저녁에 불꽃놀이가 있다는 지역 안내문이었다. 

   같이 가자고 조를까, 싶었지만 이것도 그가 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혼자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점점 더 강아지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가  그늘을 만들어내는 벽에는 작은 창문이 달려 있었다. 이 방은 ‘쓰지 않는 방’이었다. 마나미는 그네를 밟고 올라갔다. 발뒤꿈치를 들었다. 안이 잘 보이지 않아 고개를 쳐들었지만, 그는 액자 프레임 정도 밖에 볼 수 없었다.

   창고인가?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뭐든 상관 없었다. 마나미는 다시 그네에 앉아서 발을 저었다. 끼긱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움직이고 있자니, 하늘의 색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가로등이켜질 즈음에도 날은 따듯했다. 그는 자신의 실종이 여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담장 대신 세워진 해바라기 여러 단을 바라보았다.

   토도가 귀가 한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멀리서 아라키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려다준다니까 바보 멍청아! 라고 윽박지르는 그를 저지하면서 토도는 약간 꼬인 발음으로 내가 갈 거니까! 가!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꽤나 취한 모양이었다. 마나미는 해바라기 너머로 몸을 뺐다. 토도 뒤에 서 있던 아라키타는 혀를 쯧쯧 차며 토도를 손가락질 하더니, 술을 마시는 시늉을 하고, 머리 옆에 검지를 대 빙빙 돌리는 시늉을 했다.

   아라키타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토도는 마나미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해바라기 앞에 서서 그에게 인사를 하자, 그는 해사하게 웃으면서 마나미- 하고 이름을 불러왔다. 대답 대신 멍, 하고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내자 토도는 그게 재미있다는 듯 꺄르르 웃었다. 봉선화 씨앗이 터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집 잘 지키고 있었어? 라고 물으며 토도는 낮은 담장 너머로 손을 뻗었다.

   해바라기 앞에 서서, 마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잠겨서 못 들어갔어요, 라고 말하자 그는 얼른 열어주겠다면서 서툴게 걸었다.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이 이상했다. 다리 삐었어요? 라고 묻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위화감이 드는데 술을 마셔서 더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말하는 그의 표정이 묘하게 억울해보여, 마나미는 더 묻지 않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토도는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마나미는 그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천천히 제게로 끌어왔다. 상체가 제게로 다가왔다. 토도는 두 걸음을 걸어왔다. 좁혀진 거리에 눈을 마주쳤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은 취기 때문일 것이다. 토도는 땡큐, 하고 말했다. 둘은 정원을 거쳐, 대문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천천히 걸었다. 토도는 문 앞에 서서, 문득 해바라기 쪽을 바라보더니 


   “마나미.” 


   라고 이름을 불러왔다. 마나미는 네? 하고 다시 말하자, 그는 그에게 해바라기 곁에 서 보라 말했다. 해를 잃어 방향을 잡지 못하는 꽃들 앞에 서자, 토도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양 손의 엄지와 검지로 프레임을 만들더니, 마나미를 그 안에 가두었다. 이게 보고 싶었다며 드물게 솔직하게 말하는 그는 마나미가 아닌 더 먼 곳의 마나미를 보고 있었다.

   착각할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옆에서 보고 있다보면 알 수 있다. 마나미는 그에게로 한 달음에 달려왔다. 잘 했어, 라고 말하며 토도는 개를 칭찬하는 것처럼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절대로 주인을 물 수 없는 개라는 걸 아는 듯 했다. 마나미는 그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원 관리는 따로 했어요?”

   “아니. 슈사쿠가 도와줘. 종종.”


   해바라기가 말라 죽지 않게. 토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뒤를 돌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마나미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손을 뻗어 그것을 정리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의 파란색 눈동자는 묘하게 물먹은 빛을 하고 있었다. 토도는 그 묵직한 시선이 저를 누를 때 마다, 제가 수조에 갇혀 아가미호흡을 하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한여름 장마처럼 눅눅하고 습기찬, 그런 느낌. 토도는 다시 뒤를 돌았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마나미가 따라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토도는 집안의 불을 켰다. 소파에 쓰러지듯 앉자, 마나미는 물을 따라왔다. 조만간 물 새로 사야겠어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든 걸 두달 분만 준비했다. 예정 된 일이었다.


   “해바라기, 좋아해요?”


   마나미는 찬 물잔을 건네며 물었다.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능소화는?”

   “그것도.”


   마나미는 그의 앞에 앉았다. 개가 주인을 올려다 보는 것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바닥에 올려놓고 있다가, 토도의 두 무릎 위에 얹었다. 그를 올려다보자, 토도는 강아지를 쓰다듬듯 그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마나미는 소라의 털을 빗을 때를 떠올렸다. 그의 손길에는 특벼한 것이 없었다. 그것이 조금 비참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멀리서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시간 정도 계속 된다는 전단을 떠올렸다. 토도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집에서는 잘 보이질 않았다. 같이 가자고 조르니 고개를 저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다가, 마나미는 그의 허벅지에 팔을 올리고 체중을 실었다. 넘어뜨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요.”


  토도는 대답 대신 그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만 하라는 나름의 신호였겠지만 마나미는 그것을 무시했다. 가요- 하고 다시 한 번 조르니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전거는 타지 말고, 러닝화를 신고 걸어요. 네? 라고 권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토도는 물 한잔을 다 마시더니 손목에 있는 머리끈으로 머리를 대충 묶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카타를 입을래? 라고 묻는 그에게 마나미는 지금? 하고 대답했다.


   “있어요?”

   “아마도.”


   토도는 쓰지 않는 방 쪽으로 갔다가, 세탁소 비닐에 쌓여 있는 남색 유카타를 꺼내왔다. 다짜고짜 벗어, 라고 말하는 통에 마나미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대충 입고 온다고 말하자 토도는 뚱한 얼굴로 오비를 쥔 채 소파에 앉았다. 마나미는 목욕탕으로 쏙, 들어가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었다. 세탁소 비닐을 벗겼다.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소매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딱 맞았다. 길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색 천에는 흰색으로 나팔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담장에 있는 보라색 나팔꽃을 떠올렸다. 마나미는 대충 옷을 여민 채로 토도에게 다가갔다. 토도는 오비를 쥔 채로 눈을 감고 있다가, 발소리가 들리자 눈을 떴다. 매초롬한 눈가 끝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살갑게  웃었다. 그 광경에 순간 침을 삼켰다. 

그는 마나미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오너라, 마나미.”


   언젠가의 무언가와, 겹쳐 들리는 목소리에 마나미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그의 앞에 바로 서자 그는 허리에 오비를 둘렀다. 망설일 것도 없이, 간단하게 매는 모습에 감탄하자 그는 자신이 하코네 유명 온천 여관집 장남이라 말하면서 웃었다. 얼어버린 호수 같은 표정이 웃을 때는 여름마냥 햇살스러웠다. 남색이 잘 어울릴 줄은 몰랐어요, 라고 말을 꺼냈다. 바보 같은 말이었다.

   꺼내지 않아도 될 말을 토도는 깊이 들었다. 그는 가만 생각하다가, 이미 어울릴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는 안 입어요? 라고 말하자 그는 그런 어린애 같은 취미는 없다고 말했다. 마나미는 제 것은 이미 다 버려버렸다고 말하는 그의 그림자를 지그시 밟았다. 그럼에도 멀어지는 그것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토도는 더 이상 절뚝거리지 않았다. 대신, 평소보다 느릿하게 걸었다. 마나미는 문을 닫고 나오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게다는 신지 않았다. 불꽃놀이를 하는 강가로 가려면 시간이 걸린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자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토도는 묘하게 신이 나 보였다. 이미 많이 마셨던 게 아니냐고 묻자 그는 그런 걸 묻는 건 풍류가 없다면서 킬킬 웃었다.

   좀 더 다른 이야기를 해 보라는 말에 마나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보라색 나팔꽃은 토도 선배의 취향이죠? 라고 물었다. 토도는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같은 수긍이었다. 집 근처의 편의점에서 기린이치방과 삿포로를 샀다. 마나미는 손목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맸다. 탕후루를 사주겠다며 신나게 앞으로 걸어가는 토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체온은 차갑고 싸늘했다.

   멀리 가버릴 것 같은 밤이었다. 여름밤의 색채는 깊고도 깊다.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있는 건물에는 불이 다 꺼져있었다. 주황색과 하얀색 빛이 섞여 있는 가로등 아래로 걸어갔다. 멀리서 터지는 불꽃 소리를 듣고 뒤늦게 밤하늘을 바라보면, 이미 모양을 내고 사라지는 티끌 같은 빛무리가 보였다. 토도는 마나미의 유카타 소매를 바라보다가, 보폭을 맞추어 옆에 섰다.


  “봉선화도, 좋아해요?”


   마나미는 가볍게 물었다. 축제 장소로 다가갈수록 사람들이 보였다. 둘이서 이런 시간에, 사람이 많은 곳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꿈같은 기분이었다. 곧 깨져버릴 유리알 같은 시간이라 생각했다. 마나미는 그의 손목을 꼭 쥐었다가, 손가락을 엮어 잡았다. 약속을 하는 것 같이, 마나미의 검지와 토도의 새끼손가락이 가볍게 엮여, 후덥지근한 여름 위를 움직였다.


   “그건, 좀 미신 같은 거야.”


  토도는 가만 걷다가, 문득 대답했다. 그의 타이밍은 알기 어려웠다.  미신? 이라고 묻자 토도는 겨울이 올 때 까지 물들인 게 남아 있다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야트막한 숲길로 들어갔다. 사람이 있는 곳이 싫은 모양이었다. 굵게 갈린 흙들과 자갈을 밟으면서 올라갔다. 자전거로 올라설 때 보다 숨이 찼다. 다시 불꽃이 터졌다.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고 하자, 그는 자신의 팬이 알려 줬다고 말했다. 출처가 어딘진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에 조금 남은 말이라 슈사쿠에게 부탁해서 심었다는 말을 하면서, 토도는 숨을 내뱉듯 쉬었다. 마나미는 그와 얽혀있는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열대야의 더운 바람이 목 뒤를 간질였다.


    “그런 거 믿어요?”

   “응.”


   토도는 가만 대답했다. 또 다시 불꽃이 터졌다. 하늘을 곧장 올려다보았다. 붉은 색 꽃불이 터졌다. 연달아 쏘아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도는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소리를 들으면서 한참을 올라갔다. 손목에 든 검은색 비닐 봉투가 무겁다고 느낄 때 쯤, 그들은 산중턱, 트여있는 공터에 도착했다. 선객은 아무도 없었다. 토도는 벤치에 앉았다. 마을이 한 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비밀 장소 같아요, 라고 말하자, 그런 셈이지 라는 대답이 들어왔다. 묘하게 그리운 느낌이었다. 마나미는 토도의 옆에 앉았다. 맥주를 건넸다. 미지근해진 것을 땄다. 캔을 따는 소리는 기분이 어떻든 언제나 경쾌하기 마련이었다. 둘은 피어오르는 불꽃을 들여다보았다. 불꽃이 반짝일 때 마다, 마음이 소란스러웠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토도 선배.”

   “응.”

   “그런 거 믿고 있으면.”


   내 손톱에도 들여줘요. 마나미는 문득 말했다. 토도는 그의 손을 흘겨다보았다. 벤치에 있는 길고 가느다란 손. 저보다 더 커 버린 그의 손마디를 바라보다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흔적처럼 남게 되어 싫지 않아? 라고 묻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마나미는 다시, 약속을 상기시키듯 저는 선배의 개잖아요, 라고 말하며 웃었다.

   맥주를 살 때 같이 샀던 딱딱한 과자를 펼처 놓았다. 다음 불꽃이 피어오를 때 까지,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안주를 집어들려던 그의 손가락과 손등이 닿았다. 토도는 마나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유카타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다가, 다음 불꽃이 피어오를 때 쯔음에야 겨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라고 말했다. 마나미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누구?”


   마나미는 입술을 열었다. 그 순간, 불꽃놀이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하늘에서 반짝이는 지, 평소보다 소리가 컸다. 토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나미는 아무 이름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치사해, 라고 말하면서 혼자 맥주를 들이키는 토도를 바라모다가, 마나미는 가만히 먼 마을을 바라보았다.


    “휴가는 언제 까지에요?” 

    “…….”


    마나미는 가만히,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하게 해 달라는 그에게, 토도는 미야하라에게 연락을 하라는 말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나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키다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불꽃이 또 다시 피어올라, 어색한 두 사람의 소리를 파열음으로 가렸다. 멀리 강가를 따라 펼쳐져 있는 주황색 등불들이 눈에 들어왔다.


   “강가를 걸으면서 얼린 맥주를 마시고 싶어요.”

   “그거 좋아해?”

   “좀, 그러고 싶은 기분인데. 안 되나요?”

   “좋아하는 거야?”


   토도의 질문은 집요했다. 마나미는 맥주 캔 입구를 잡고 있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가 꼭, 대답을 원하는 질문의 기준을 알 수 없었다. 마나미는 그를 바라보았다. 깊은 색의 눈동자가 저를 들여다 볼 때, 그는 무한한 궁금함을 느꼈다. 좀 더 알고 싶고, 좀 더 닿고 싶었다. 그가 저를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나미는 좀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숨을 토하듯 내뱉었다.

 

  “잘 모르겠어요. 근데, 계속 하고 싶은 거면 그건 좋아하는 건가?”


    토도는 가만, 그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옆모습은 가지런했다. 가로등 빛이 닿은 곳이 스산했다. 마나미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울컥거리는 치받침이, 모두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토도는 맥주 캔을 옆에 내려두었다. 손을 뻗어 마나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네가 아니라서 모르겠어.”


    그는 가볍게 말했다. 어깨에 귀를 댄 탓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서 들렸다. 작은 과자봉지 하나의 거리를 두고, 무리하게 기댄 자세는 불안정했다. 한쪽이 무리하게 기댄 자세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울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에 토도는 안도했다. 마나미는 그의 말을 곱씹듯 가만히, 가만히 하늘을 수놓으며 퍼져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다가 문득


   “서로가 아니라는 건 어렵네요.”


   라고 말했다. 그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기에 밤은 그저 고요했다. 간간히 우는 벌레소리와, 터지는 불꽃소리, 그리고 어깨에서 뱉는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그들의 세계에 들어 있었다. 토도는 벤치에 내려둔 맥주캔을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여러 발의 불꽃이 화려하게 터졌다. 형형색색의 모양이 깊은 여름밤을 수놓았다.


  “끝나는 모양이야.”


    토도가 중얼거렸다. 마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미가 누르던 체중이 어깨에서 사라졌다. 그 감각이 어색했다. 토도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갈까요? 라고 묻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나미의 소매에 감겨있는 유카타 자락을 살펴보았다. 예전에는 좀 더 컸던 것도 같은데, 따위의 미련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들은 가로등이 점점이 피어있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언덕을 돌 때 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빛무리들 앞의 마나미를 볼 때 마다 숨이 막혔다.

   어린 시절의 미련에 안녕, 을 말해야 할 차례였다. 눈 내리던 날의 삿포로에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 때를 살아가는 그는 너무나도 찬란하게 아름답고,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벅차며, 언제나 꼭 제 것만 같아서 입술을 때는 일이 어려웠다. 한 번 겪은 일을 또 다시 반복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었다. 이제 안녕, 해야 할 시간이었다.

   마나미가 있을 곳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선택한 미래에 폐를 끼쳐선 안 된다. 기억이 모두 돌아오고 나서 경멸받지 않으려면 선배다운 선택을 해야 한다. 토도는 한 걸음 앞서서 걸어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직 터트릴 것이 애매하게 남았는지, 불꽃이 터지는 소리는 아까보다 더 넓은 간격으로, 천천히 들려왔다. 보통 보다 느린 시간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점점 산을 내려가는 보폭이 좁아진다. 이 시간을 끝내기 싫은 미련 때문이었다. 앞에선 마나미가 걸어가고 있다. 그의 등을 바라보는 건 조금 괴롭다. 한 번 손에서 놓았으니 두 번째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렇다. 토도 진파치는 요령이 좋은 사내였다. 신께서 세 가지 재능을 받았다. 아름답고, 말도 잘하며, 잘 오른다. 못하는 운동이 없다. 그늘 한 점 없이 찬란한 인생을 살아왔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나미의 앞에만 서면 마음이 이지러진다. 자꾸만 애매하게 흐트러지는 마음에는 미련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깊은 밤은 여름이라도 쌀쌀했다. 몸을 움츠렸다. 계절이 끝나가는 게 느껴졌다. 끝난 팔월보다는 남은 팔월이 현저하게 적었다. 코끝이 아려왔다. 미련엔 안녕을 고해야 한다. 그것을 듣는 게 비록, 몇 년 전 삿포로의 겨울에 함께 있었던 마나미 산가쿠가 아니라고 해도.

   기억을 잃은 그는 제 사랑이 아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밀어내고 싶은 것은, 그것이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토도는 산책하는 강아지처럼 제 앞을 걸어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랑했다.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등이었다. 달려가 끌어안아도 어색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토도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제 뒤를 따라오는 소리가 없자 마나미는 뒤를 돌았다.

 

    마나미, 하고 부르자 그는 네, 하고 대답했다.

   웃는 모습은 해바라기처럼 환했다. 여름날 햇살 아래서 반짝이는 노랑 같았다. 그는 그를 바라본다. 여름 하늘처럼 쾌청했다.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불가항력적인 모습이다. 헤어지자, 라고 문득 말할 뻔 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그는 언제나 반짝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 아파요? 라고 질문하며 마나미는 거리를 좁혔다. 토도는 순간 한 걸음을 뒷걸음질 쳤다.

   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놀라울 정도로 예쁘게 웃었다. 홀리는 듯 했다. 날개를 처음 볼 때와도 같은 기분이었다. 바람을 타고 목표를 향해 페달을 밟는 것처럼, 그는 토도에게 불쑥 다가왔다. 온 시선과 감각이 그에게 쏠리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그의 뒤를 달린 적이 없는데도 알고 있었다. 토도는 숨을 서툴게 들이켰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완전히 멈춰버린 듯 했다. 늦여름 축제의 마지막 불꽃이 터졌다. 가로등 불빛의 주황색이 그의 머리카락에 잔잔하게 들어 있었다. 타고 남은 잔불꽃이 떨어져 내렸다. 궤적을 그린 빛이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나미는 토도 선배, 라고 속삭였다. 반사적으로 눈을 마주쳤다.

   반짝이는 하늘 아래서 마나미는, 선언하듯 말을 내려놓았다. 


   “좋아해요.”

   온 우주가 흔들렸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마나미는 멍한 모습으로, 저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토도를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라고 재차 말하면서 거리를 좁혔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 끝을 잡았다.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품에 그리쥐었다. 저보다 한 뼘 가량은 작은 그의 몸을 쓰다듬다가 입술을 겹쳤다. 술 냄새가 났다. 땀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열린 입술에 숨을 겹쳤다. 깊고,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토도는 그를 끌어안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쁘지 않았다. 가볍게 숨을 때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건, 내가 할게요. 라고 말하자 울 것 같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마나미는 토도의 등을 쓰다듬었다. 거리 없이 붙은 몸에서는 여름 특유의 땀냄새가 났다.

    모든 것이, 그 해 여름을 닮아 있었다. 그 해 여름의 소년을 반추했다. 일학년 인터하이 때 제게 나아가라며 목이 터지라 외치던 선배의 향이었다. 마나미, 라고 놀란 듯 부르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코끝으로 체향을 들이켰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는 마치 두 사람만의 우주 같았다. 그는 토도의 가느다란 날갯죽지를 쓰다듬었다. 손등에 닿는 머리카락은 마치 미련처럼 붙어왔다.

   다시 눈을 마주쳤다. 모든 게 그 해 여름을, 생각나게 했다. 순간 흠칫해 뒤로 물러섰다. 토도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안 돼, 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토도는 그의 몸을 밀었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는 서툴게 도망갔다. 그의 움직임에는 소리가 잔뜩 묻어 있었다. 삐걱거리고 있었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억울했다. 모든 감정들이. 그에게 닿자마자 느낀 모든 게. 불가항력적이고 중력 같이 작용하는 그 순간들이. 또 다시 도망쳤다. 다시 아침은 찾아오고 계절은 가을이 될 것이며, 토도는 다시 이 밤만 없으면 좋을 것이라는 듯 굴 것이다. 그는 입술을 더듬었다. 더듬은 자리는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산 중턱 도로에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었다. 로스 없이 움직일 수 없었다. 마나미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그이기 때문이다. 해묵은 감정 때문이었다. 놓아주어야 하면서도 놓아줄 수 없다. 지독한 자기모순에 숨이 막혔다. 토도는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잘라야 함을 알면서도 잘라버리지 못한 제 흔적들이 무겁게 흔들렸다.

   숨이 막혔다. 지독한 열사병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사랑은 마치 순환하는 계절과 같다. 적어도 토도 진파치를 사랑하는 마나미 산가쿠는 그러하다. 마나미는 그가 도망친 길을 눈으로 훑었다. 도망치는 모습은 서툴렀다. 이런 모습을 보는 건 꼭, 두 번째였다. 그는 제 손아귀에 들어왔던 온기를 추억했다. 딱, 이 정도의 느낌이었다. 허공을 부드럽게 끌어 안았다. 제 품에 있던 것이 꿈만 같았다. 이미 모두 타버린 채, 미미한 화약냄새만을 남겨둔 불꽃놀이 같았다.

   한 여름 밤의 아련한 꿈. 미련의 이름으로 지속했던 놀이를 마나미는 천천히 반추했다. 그는 집으로 걸었다. 토도는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지켜보는 것은 익숙했다. 마음이 정리된 채로 돌아와 다음 날에는 변함없이 아침 인사를 건넬 것이다. 언제나 혼자 멀리 뻗어간다. 감정을 정리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소리 없이 가속하는 것은 비단 페달의 일만이 아니다.

   매정한 사람. 이라고 속삭이다가, 사랑스러운 사람. 이라고 중얼거린다. 마음은 파도처럼 일렁였다. 갑자기 밀려와 발목을 순식간에 적셔버리고 도망가는 물결 같다. 마나미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는 제게 딱 맞는 유카타의 자락을 바라보았다. 흰 선으로 새겨져 있는 나팔꽃은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나미는 천천히 걸었다. 여름의 지독한 더위를 닮은 사랑은, 그의 숨을 천천히 막아버리는 듯 했다.

   불꽃놀이가 끝난 후의 밤은 그저 비어있고, 공허하고, 애매했다. 축제의 열기와 허무함이 혼재되어 있는 밤을 그는 그저 걸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마나미는 그의 집에 찾아갔다.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둬야 할까. 그는 토도가 문을 열 때 힐끔 봤던 비밀번호를 떠올리다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토도의 저의를 알 수 없으니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마나미는 현관문에 기대었다. 그가 꾸려놓은 정원에는 해바라기가 있고, 담벼락엔 능소화가 아련하게 걸려 있었다. 이렇게 되면 우체통은 그 색일 수 밖에 없다. 마나미는 멍한 눈으로 대문께의 우체통을 바라보다가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껏 새장 문을 열어주었더니, 다시 들어온 새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여전히 『애매하게』 상냥하다. 그것이 버릇일 이는 없었다. 자신을 앞에 두면 생기는 그의 특질 같은 것이다. 속이 꼬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무어라 따질 기운은 없었다. 좋아해요, 라고 속삭인다. 언제건 자신이 그에게 할 말은 하나 뿐이었다.

   매캐한 담배를 떠올린다. 가을에 가까운 늦여름의 밤은 여전히 축축하다. 습기가 가득 찬 여름은 언제나 호흡하기 어려웠다. 토도 진파치는 지극히 겨울 같은 사람이면서도 여름의 한 여름을 닮아 있었다. 마나미는 초조하게 그가 돌아올 산길을 바라보았다. 발목을 절뚝거리던 것을 떠올리다가, 찾으러 가기 위해 일어섰다가, 다시 자리에 앉길 반복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감정이 일렁였다. 열이 만든 돔 안에 갇혀 서서히 익사하는 기분이었다. 마나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잉크 한 방울이 물에 풀리는 것처럼, 감정은 서서히 제게로 녹아간다. 더웠다. 유카타의 앞섶을 흔들었다. 제 손목에 꼭 맞는 소맷부리를 보다가, 그것을 입혀준 주인을 떠올리고 눈을 감았다. 가슴은 여전히 뛰고 있다. 살아있음을 실감하듯 마음은 파도쳤다. 멀리서 풀벌레가 울었다. 꿉꿉하고 찝찝했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기에 잠들 수 없는 열대야熱帶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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