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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토도] 사랑을 전하고 싶다던가,2019. 2. 14. 00:43
*발렌타인 사다리 연성교환으로 쓴 글입니다. *비틀린 짝사랑 주의 *** 장미꽃을 샀다. 이파리를 모두 땠지만 가시는 남겼다. 생화 보관용으로 사용하던 통 밑바닥에 깔린 장미의 색은 짙은 빨강이었다. 입을 다문 그 애와 퍽이나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발렌타인이기 때문에 남은 꽃이 이것 밖에 없다는 목소리를 듣는다.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꽤나 수다스런 인상의 꽃집 주인은 그를 쳐다보다가, 괜히 구시렁거리면서 벌레 먹은 이파리를 툭, 툭, 땠다. 요즘 인기 있는 포장으로 해줄까, 라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꺼내든 것은 크라프트지가 아니라 마와, 아주 얇은 철사가닥으로 짜인 탄성 있는 소재였다. 촌스러운 분홍과 색이 죽은 녹색은 그렇게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정말로 인기가 있는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어쩐지 시들어 있는 장미 스무 송이는 그를 만나러 갈 때의 구색 같은 것이었으니, 겉모양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기분이었다. 가시가 남아있는 가지를 철사로 듬숭듬숭하게 엮는 것을 보다가, 마키시마는 가게에서 나왔다. 근처의 멋쟁이 꽃집들은 다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려 낡고 허름한 가게를 바라보았다. 후, 하고 숨을 내뱉자 하얀 김이 서렸다. 발렌타인 주제에 추운 게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오물거렸다. 재킷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를 만날 때 몽땅 분질러버린 담배가 아쉬웠다. 숨을 연기처럼 내뱉었다. 값을 지불하고 꽃집을 나왔다. 자신의 방 쓰레기통이 생화를 담는 통과 같은 모양과 패턴이란 걸 반추하다가 길을 걸었다.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은 소란스러움 하나 없이 고요했다. 이 시간 특유의 잔잔함을 밟을 때 마다 구두굽소리가 요란했다. 파트너 없는 탭댄스를 추는 느낌이었다. 마키시마는 왼손에 든 장미꽃이 번거롭고,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길가에 무단 주차되어 있는 차의 보닛에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요정 대모의 마법도, 신데렐라의 드레스도 모두 끝난 시간이었다. 발걸음이 어째 무거웠다. 초콜릿은 사지 않았다. 그 애는 단 걸 즐기지 않았다. 꽃다발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괜히 볼을 긁적였다.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키시마는 뒷목을 긁적였다. 코트에 달려 있는 부드러운 털이 손등을 간질였다. 최대한 늦게 가고 싶었다. 마음은 어색하고 이상하게 삐그덕댔다. 겨울바람에 토해내는 기침처럼 목 끝이 이상하게 술렁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만나기 싫다.’는 생각을 한 이후엔, 반드시 그 애를 만나게 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정해진 문법이었다. 숨을 토해냈다. 몇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익숙한 심야 카페에서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알파벳 A 다음에 B가 오듯, 혹은 자연수 1 다음에는 2라는 숫자가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숨이 답답했다.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목을 만졌다. 숨이 텁텁했다. 긴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졌다. 머리를 정리한단 핑계로 발걸음을 멈췄다. ― 발렌타인은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주려무나, 마키야. 그 애는 제법 명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제법 또랑또랑하게 울렸다. 전화 너머의 그 애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게 분명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키시마는 확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니, 라고 말하자 어차피 친구는 2등이 되어도 된다면서 발랄한 대답이 돌아왔다. 밸런타인이 ‘아무 날도 아닌 날’이 되는 시간에 거기서 기다리겠다는 토도의 목소리는 경쾌하기까지 했다. 친구는 언제나 2등이어도 괜찮지. 물론 너의 오랜 경쟁자로서 산 정상의 1등은 양보하지 않지만, 친구는 소중한 사람의 후순위가 되어야 해. 그는 마키시마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귓가에 오래 감기는 목소리는 다분히 진지했다. 마키야, 너는 상냥하고 착하지만, 가끔씩 그게 전달이 되지 않을 때가 있어. 그러니까 소중한 사람에게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야 한단다. 2월 14일 정도는 나를 만나지 말고 그 사람을 만나. 집에 있는 오래된 전화의 전선을 베베 꼬며 들었다. 연식이 꽤나 된 전화선은 꼬인 채로 풀리지 않았다. 너랑 먼저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라고 변명하듯 말하자 토도는 쾌활하게 대꾸했다. 마키시마는 그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귓가가 윙윙거렸다. 꽃다발을 잡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건널목의 신호등 컬러는 환한 빨강이었다. 마키시마는 눈을 비볐다. 귀울음처럼 그의 목소리가 번졌다. ― 셋째 주 수요일이라고 했기에 14일인 줄 모르고 있었잖아. 일부러 대답하지 않아도, 토도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 이건 이 내 실책이야. ― 하지만 ― 마키야. 타이르는 어조로. ‘마키야’ 라고 말할 때, 마키시마는 저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잃어버린 줄 알았다. 말주머니를 더듬어도 토해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14일 당일에 잡고 싶었던 약속을 어영부영 15일 새벽으로 미뤘다. 빨리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히 불러낼 핑계가 없어 15일 오후에 귀국한다는 거짓말을 했다. 하단부의 지지대를 빼서 위에 아슬아슬하게 괴어두는 젠가 같았다. 맘 편하게 만나는 날이 없었다. 기침이 났다. 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오히려 콜록대는 소리만 켜졌다. 한숨을 내쉬었다. 싸구려 초콜릿 같은 기분이었다. 마키시마는 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초콜릿의 맛을 떠올렸다. 꼭 지금의 저 같은 맛이었다. 아직 빨간 불이 들어 있는 건널목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달려 건넜다. 허술하게 묶은 장미 몇 송이가 도로 위에 떨어졌다. 주우려 뒤를 돌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차가 지나갔다. 바퀴에 짖이겨진 꽃잎은 유난히 붉었다. 아스팔트에 내리는 밝은 가로등이 그것의 마지막을 밝혀주었다. 마키시마는 뒤를 돌았다.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토도는 그 가게에 있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애는 정해진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베베 꼬인 제 속과 퍽 다른 모양이었다. 마키시마는 허술해진 꽃다발을 왼손에 꼭 쥐었다. 그에게로 가는 길은 언제나 준초콜릿 같은 맛이 난다. 카카오 함량도 20%밖에 되질 않고, 대용유지가 포함되어 혀에 미련 있게 남는 맛이었다. 퍼석퍼석하고 팍팍했다. 힘없이 부스러져서 입 안에 더럽게 남는 맛 따위를 떠올리며 마키시마는 횡단보도를 걸었다. 보행자가 있음에도 미처 멈추지 못하고 눈앞을 쌩 달려가는 차의 뒤꽁무늬를 바라보았다. 새벽 치고 요란한 주행이었다. 마키시마는 천천히 길을 건넜다. 대량으로 찍어내는 레디메이드에 마음을 담는다면 몇 퍼센트나 담길까. 혀끝에서 미련처럼, 지겹게 녹아가는 것들을 떠올리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또 다시 건널목이었다. 준초콜릿은 가짜 초콜릿보다는 다정하고 진짜 초콜릿보다는 퍽퍽했다. 마키시마는 꼭 그게, 토도 같다고 느꼈다. 그가 주는 모든 것들은 우정보다는 다정했지만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랐다. 친구, 라는 말을 입에서 굴렸다. 굴리던 것에 목소리를 담아 내뱉는다. 아무도 없는 길거리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제 인생에서 그는 그 정도 위치면 족했다. 그 정도의 비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키시마는 숨을 내뱉었다. 한숨처럼 쉽게 그를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에게 가는 길은 모두 가정으로 자리했다. 끊임없는 후회와 망상 속을 걸었다. 내뱉기 시작한 거짓말들이 모두 그림자가 되어 발목을 잡아채는 것 같았다. 마키시마 유스케는 독립적인 개체이고 싶었다. 하지만 토도는 언제나 그걸 정면으로 무너뜨린다. 자신을 하나의 완전한 것의 ‘반절’로 격하시킨다. 산 위에서 맺은 관계가 잘못되었던 걸까, 고민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키시마를 사랑이라는 이름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두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지만 성립하는 경쟁자처럼, 사랑에는 두 사람이 필요했다. 마키시마는 자신의 감정이 그에게 귀속되는 게 싫었다. 사랑의 방향성에 대한 문제였다. 어떻게 되었든 자신은 사랑하고, 토도는 애정할 게 분명했다. 그는 라이벌을 사랑의 대상으로 봐주질 않는다. 게다가 토도는 언제나 사랑이 헤픈 남자였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오는 올곧은 호의의 일부분은 라이벌에 대한 걱정과, 그것을 가짐으로 인해 완전해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기애일것이다. 케이크 위에 올려가 있는 싸구려 초콜릿의 카카오 버터 함유량 정의 진심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마키시마는 미식을 즐기는 남자였고, 그런 준초콜릿 같은 사랑에 속지 않았다. 하지만 싸구려 같은 애정인데도 그가 주는 것은 언제나 달콤해서, 그게 정말로 진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을 친구로 대하는 그에게 서툴게 기대하고, 혼자 실망한다. 어쩜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 있을까. 마키시마는 다리를 건넜다. 새벽 가로등에 반짝이는 강물은 마음만큼 짙었다. 그는 그것을 응시하다가, 제 왼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을 던졌다. 허술하게 묶인, 스무 개에서 몇 송이가 부족한 장미꽃들은 잠시간의 공중을 맛보다가 물속으로 순식간에 떨어졌다. 장미의 무게는 퐁당, 소리를 내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뿌리가 잘린 지 오래 되어 색이 바래버린 장미는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일찍 버리지 못해 아쉬웠다. 오해의 소지를 줄 수 있는걸 여즉 쥐고 걸어왔다는 것이 이상했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았다. 야트막한 강물에 잡아먹혀 떠내려가는 꽃송이까지 가로등이 비추어주지 않았기에 마키시마는 그것의 끝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것을 꼭 쥐고 있던 왼손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잘 버렸어, 잘 버렸어, 잘 버렸어, 하고 인정하듯 속삭였다. 비참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애초에 그에게 특별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으면 했다. 스스로의 나쁜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친절하게 대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모르기에 섣불리 풀 수 없는 매듭 같았다. 그에게 자신은, 자신에게 그는 준초콜릿 정도의 무게감이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서로를 적당히 불러내 새벽에도 만날 수 있는 관계지만 서로를 속박하지는 않는 관계. 좋아해, 라고 말하면서 절대로 그게 사랑으로 오해하지는 않는 미적지근한 사이. 마키시마는 그것이 자신과 토도 사이의 이상적인 거리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발렌타인에 만나고 싶었다. 벌레가 먹지 않은 장미를 예쁘게 포장해서 건네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닌 날보단 특별한 날을 원했다. 따로 만나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15일에 도영하지 않는다. 셋째 주 수요일이라고 했던 건 일부러였다. 그렇게 말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사실은 이런 새벽에 불러내고 싶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토도였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마키시마 유스케는 토도 진파치를 사랑하고 있었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제게 다가오는 이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싸구려 초콜릿 같다고 생각한다. 토도가 제게 주는 모든 호의들을 속단하지 않으려 한다. 일부러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저를 쫓아오는 게 사랑스럽다고도 생각했다. ‘라이벌’이고 ‘호적수’이고 ‘친구’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호의였다. 초콜릿이 아닌데도 초콜릿인 척 하는 준초콜릿 같은 애정이었다. 마키시마는 다리를 건넜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이 홀가분했다. 카페의 문을 연다. 마키야! 하고 소리치며 다가오는 그의 목소리는 햇살처럼 밝다. 방향성이 다른 사랑에 대해서 생각한다.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죽이는 방법은 그를 밀어내는 것뿐이라고 확신한다. 반가워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수줍어하는 건 여전하구나, 라고 멋대로 해석해주는 게 고마웠다. 그가 앉아있던 바 자리에는 무언가의 포장지가 보였다. 우정이 담긴 진심 초콜릿을 흘겨본다. 마키야, 네 것이란다! 라고 말하면서 웃는 그는 해바라기를 닮았다. 한숨을 내쉰다. 나는 준비 못했어,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럴 줄 알았다면서 토도는 마키시마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구김살 없이 한없이 밝은 모습이었다. 짓이겨지고 물러터지고, 벌레 먹은 자국이 있는 제 맘과는 영 딴판인 모습이었다. 마키시마는 올곧은 사랑은 믿지 않는다. 그의 우정이 사랑으로 변질될 것 또한 믿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제게로 달려오면서 짓는 환한 미소 따위를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이 덜컥거리고 두근거리면서 그저, 준초콜릿 같은 눈속임 수에도 속아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준초콜릿이 여전히 초콜릿이라는 이름으로 팔려나가는 것처럼. 마키시마는 그의 손에 들린 포장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귀찮다, 라는 표정을 꾸며냈다. 밀어낼수록 다가오는 것은 그의 속성이었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야할 순간이었다. 사랑을 전하고 싶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울적한 기분이라 마키시마는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포장지를 뜯었다. 고민하지 않고 초콜릿을 집었다. 손끝에 코코아 가루가 묻었다. 생초콜릿은 입에 넣자마자 녹기 시작했다. 좋은 재료를 써서 만들었는지 입에 남는 텁텁함이 없었다. 손가락 끝에 묻은 것을 빨고 케이스를 보다가 토도를 바라보았다. 마키야, 네가 좋아하는 맛이지? 라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키스하고 싶은 것을 참는다. 뭐, 먹어줄 만은 하네. 라고 말하면서 다시 다음 하나를 입에 넣는다. 분명 부드럽고 적당히 달게 맛있는 초콜릿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짜, 라는 생각만이 진하게 남았다. 강물 아래로 버리고 온 벌레 먹은 장미의 이파리와 날카로운 가시 따위를 떠올리면서 마키시마는, 오랜만에 만난 사랑스러운 토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졸려, 라고 중얼거렸다. 센티멘털한 밤이었다. 요정 대모의 마법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도 모두 끝나버려, 사랑의 편린조차 찾을 수 없는 그런 날이었다.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걸어오는 토도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괜찮았다. 이 거리에서도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마키시마는 시선을 피했다. 혀 위에 올렸으나 내뱉지 못한 사랑의 밀어들이 초콜릿과 함께 위장 속으로 녹진하게 담겼다. 체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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