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토도] 그 해 여름 소년 2

프로 로드레이서 마나미 x 프로 로드레이서 토도 

연령, 미래 조작, 기억상실 요소 있음. 






"햇살이 잘 드는 넓은 창이 있는 집"






***


   행방불명. 이라는 글자가 제 얼굴 옆에 적혀 있는 걸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그는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전단지의 글씨가 약간 흐려진 것처럼 보였다. 감흥 없이 느껴지는 글자들을 바라보며 마나미는 하품을 했다. 사람을 자울자울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방 안에서는 햇볕 냄새가 진하게 났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토도 선배』스러운 향이었다.

   전단지에 있는 내용은 무미건조하고 애절했다. 마나미는 제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웃고 있는, 모르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에 담겨 있던 함의도, 함축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어색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는 전단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제 입에서 나오는 글자가 담고 있는 함축 또한 그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마나미 산가쿠. 프로 로드레이서. 스물여섯 살. 남자. 비오는 날 하코네 산을 혼자서 올라가다가 낙차 한 것으로 추정. 이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단기적인 기억상실이 온 상태입니다. 이 사람을 보신 분은 아래의 연락처로 연락 바랍니다. 어색한 단어의 나열처럼 느껴지는 모든 정보들을 바라보며 마나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와 얼굴이 닮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요약해둔 걸 보는 기분이었다.

   프로- 로드레이서- 라는 말을 입 안에서 굴렸다. 단어는 제법 입에 달라붙지 않았다. 사탕 대신, 녹지 않는 플라스틱을 빨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나미는 햇볕이 들어오는 창 아래에서 다리를 쭉 뻗었다. 그는 이른 아침 산책을 나갔던 『토도 선배』가 주워온 전단지를 다시 눈에 담았다. 방긋방긋 웃고 있는 사진이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컷은 아니었다. 기억 상실, 이라는 단어를 그는 다시 발음했다. 이 역시 입술에 달라붙는 단어는 아니었다.

   ‘마나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베개를 끌어안아 누웠다. 베개에서도 잘 마른 햇볕 냄새가 났다. 그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의 향이기도 했다. 세탁을 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졸음이 몰려왔다. 가을이란 보통, 그런 계절이었다. 그는 창밖을 향해 몸을 뒤척였다. 파랗고 높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고 있는 지 정원에 심은 주황색 꽃무리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파도 같았다. 그는 그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집 안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메인 도로나 역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럴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혼자 살기에는 조금 집이 넓지 않나? 라고 소리를 내어 질문했지만 대답 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눈을 굴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토도 선배』가 준 숙제를 해야 했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쓸 때 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큰 대자로 눕자 햇살이 그의 전신을 가득 적시며 쏟아져 내렸다.

   집 안을 가득 채운 햇살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기계 또한 새로 장만한 탓인지 소음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마나미는 어쩐지 기억에 남아 있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크던, 낡은 냉장고를 떠올렸다. 그는 집 안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다 다시 하품을 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집이었다.


   저를 쓰다듬어주던 『토도 선배』의 손이 그나마 따듯하지 않았다면, 이 집을 유령의 집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나미는 엷게 웃었다. 그는 그를 회상했다. 오래 누워있어 까치집처럼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하얀 손은 길고 예뻤다. 군데군데 박혀있는 굳은살을 떠올리며 그는 그가 어떤 사람일지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무료한 가운데 할 수 있는 유일한 유희였다.

   처음에는 모델일까, 생각했다. 아니면 아이돌일까, 연예인일까. 마나미는 자신의 추측이 꽤나 신빙성 있다고 생각했다.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은 으레 그런 직업으로 몰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과 과연 제가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수상한 성인 남자를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고 집에 들일 정도의 보통 이상의 관계’ 였을까 생각하다가 마나미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무리 기억을 잃기 전의 저가 ‘프로 로드레이서’라고 해도 그런 관계는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리랜서 작가 같은 게 아닐까. 마나미는 그가 풍기던 우아하고 섬세한 분위기를 떠올렸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이었지만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의 아우라를 뿜어냈다. 만약 처음 만난 곳이 신사였다면 그를 ‘산신’이나 ‘요괴’ 정도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마나미는 턱을 괴었다. 집 안에 힌트가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에 그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에는 햇살이 진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도 훨씬 볕이 잘 드는 것은 이 집이 메인도로에서는 조금 벗어난 한적하고, 언덕 위의 높은 집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나미는 거실을 두리번거리다가 한 단을 높게 쌓은 복층을 발견했다. 개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그는 킁킁, 하고 냄새를 맡다가, 그가 길렀었다던 리트리버를 떠올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마나미는 사소한 걸 잘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는 제 손 닿는 거리에 있는 장난감을 눌렀다. 고요한 방 안에서 삐꼭, 거리는 소리가 났다. 삐꼭, 삐꼭, 삐꼭, 삐꼭. 그는 연속적으로 장난감을 주무르다가 곧 그만두었다. 묘하게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방 안에 무언갈 채우는 건 좋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방식은 쓰고 싶지 않았다. 마나미는 뒤를 돌아 부엌으로 갔다.

    따듯한 질감의 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진 주방은 조리대가 길고 넓었다. 요리를 하는 사람의 주방이었다. 물기가 없는 나무도마는 부엌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두었다. 마나미는 그의 요리 솜씨가 제법 좋다는 걸 떠올렸다. 반찬의 밸런스와 음식의 담음새가 좋았다. 요리사일까? 생각했다가 마나미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그건 『토도 선배』와 어울리지 않았다.

   커다란 부엌을 지나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옷이 가득 차 있었다. 어쩐지 괴랄한 느낌의 형형색색의 티셔츠와, 모던한 느낌의 셔츠와 아이템들이 놓여 있는 건 어쩐지 조화롭지 못했다. 모델은 아닐지도 모르겠어, 하고 중얼거리며 마나미는 뒤를 돌았다. 그는 이층의 루프탑과 잘 정리되어 있는 손님방, 서재와 안방 따위를 돌았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토도 선배』라는 개인이 정리되어 있는 곳은 없었다.


   집 안에 구겨 넣기에는 좁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가 보여주던 민들레 홀씨같이 흩날리는 미소를 떠올렸다. 마나미는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계단을 밟아 다시 일층으로 내려왔다. 어쩌면 제 선배니까 프로- 로드- 레이서일지도 모른다. 그게 뭘 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마나미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상실을 되새길 때 마다 오히려 더 무뎌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의식은 탱탱볼처럼 튀었다. 의사는 뭐라고 했더라. 마나미는 사회적인 합의나 지식을 제외하고서 백지 같은 상태입니다. 라고 정리해주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기억을 하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입고 있던 건 하얀색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였다. 레이싱복도 입고 있지 않았다. 신발은 로드레이스용 슈즈였으나 그걸로 마나미 산가쿠라는 공백을 유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는 사람이 찾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던 하얀 병실을 반추하다가 마나미는 입술을 부, 하고 내밀었다. 어리광 같은 행동이었으나 봐줄 사람이 없었다. 병실에 더 누워있었다면 이 전단을 만든 사람과도 만났을지도 모른다. 마나미는 좀 더 기다려야 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 같은 거실로 돌아왔다.

   마나미는 저가 계속 누워 있었던 바닥에 몸을 뉘었다. 마음속에서 덜커덕거리는 부분은 그제야 잠잠해졌다. 집을 지키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바다가 보이는 일인실보다는 훨씬 나은 기분이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떠올리다 마나미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역시 자전거를 담보로 주고 나오길 잘 했다면서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햇볕 너머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병실에서도 링거를 맞고 있지는 않았고,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방은 그렇게 나쁜 뷰는 아니었고 답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곳 보다 이곳이 훨씬 편한 이유는 왤까. 마나미는 눈을 깜빡였다. 『토도 선배』가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라고 생각하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마나미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베개를 끌어안았다. 상냥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먹물처럼 번졌다.

   심심하면 텔레비전을 봐도 좋아. 배가 고프면 냉장고를 열어 아무거나 먹어도 돼. 마음의 준비가 되면… 핸드폰을 두고 갈 테니 전단지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하렴.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네 맘 가는대로 행동해. 아니면 너를 잘 아는 위원장에게 집에 오라고 해 둘까? 마나미는 제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하던 『토도 선배』를 떠올렸다. 결국 집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는 그가 무슨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깔끔하고, 상냥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집에는 그 흔한 앨범도, 『토도 선배』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도 없었다. 마나미는 기억을 잃기 전에 저와 그가 무슨 관계였을지, 둘이 같이 있을 때 어떠한 함축적인 언어들이 오갔는지가 궁금했다. 그가 돌아오면 물어볼까. 하고 생각하다가 마나미는 몸을 일으켰다. 오후의 햇살은 여전히 노곤노곤하게 들어왔다. 시간은 생각보다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마나미는 볼을 부풀렸다. 그리고 숙제를 떠올리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은 경사로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어린애 공처럼 통, 통, 튀다가 어제 즈음에 멈추었다. 그것은 지금의 마나미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기억 중, 가장 선명한 것이었다. 온통 흑빛으로 채색 된 세계의 유일한 색채였다. ‘마나미 산가쿠’는 ‘토도 선배’를 보았던 최초의 순간을 떠올렸다.



***


   마나미가 처음 이 집에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천장이 보였다.

   병원의 천장과는 다르게 꽤나 높았다. 따듯한 느낌의 전등과 색이 바래버린 야광별이 잔뜩 붙어 있었다. 벽과 천장에 사용한 묵직한 청록색과는 다르게 키치한 느낌의 장식이었다. 방 안은 따듯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린넨으로 만들어 진 커튼과, 그 너머 베란다에 줄지어 서있는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황을 도통 알 수 없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있었다. 『토도 선배』가.

   그는 입을 다물면 냉랭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무심코 미소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두근거리는 사람이었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저가 천국에 있는 줄만 알았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천사? 라고 중얼거리자 그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며 곧바로 대꾸해왔다. 마나미는 그걸 오사카식 개그라고 하던가, 생각했다. 조금 멍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다, 그는 울 것 같은 그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툭, 건드리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움직임에 절로 제 입술이 간지러웠다. 마나미는 손을 들어 제 입술 껍질을 뜯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하기만 했다. 저기, 라고 입을 열자 그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색함을 피하려는 듯 끊임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신에게 세 가지 축복을 받았다는 그 남자는, 본인의 말 그대로 ‘토크도 끊임없이’ 하는 타입이었다.

   처음에는 귀가 아팠다. 하지만 마나미는 곧, 그에게 대답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먼저 그 미인은 왜 상자 안에 들어가 있었는지 질문했다. 아프지 않느냐고도 물었고, 기분이 어떻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잘 지냈는지’ 질문했다. 그는 마나미의 모든 걸 알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마나미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그 미인은 마나미에게 물을 주었다.

   미지근한 것 보다 살짝 따듯한 물을 마시면서, 마나미는 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오밀조밀’하다기 보단 ‘화려하고 아름다운’ 인상의 미인이 제게 집중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이벤트였다. 유리구슬 같기도 하고, 밤하늘 같기도 한 두 눈동자는 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예쁜 사람, 그러니까 『토도 선배』가 저를 주운 다음부터 삼일 동안, 마나미는 꼬박 아팠다고 했다.

   그는 마나미가 의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안 돼, 라고 중얼거리던 게 인상에 남아 제가 간호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깊게 찌푸려지는 미간은 고왔다. 냉랭한 외모와는 달리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마나미는 그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야광별이 붙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찌푸리자 ‘미인’은 손을 뻗어 얼른 커튼을 쳐주었다. 마나미는 그의 눈동자가 저를 깊게 바라보는 것을 느끼다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자 미인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더 말해야 할까, 싶어서 말을 고민하자 미인은 많이 놀랐느냐고 물었다.

   마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을 통틀어 만날 기회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 제 간호를 해주는 것은 아마도 세간에서 말할 ‘놀랄 일’의 기준에 합당하기 때문이었다. 미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머리띠를 하고 있는 이마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마나미는 손을 뻗어 그의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다.

   미인은 마나미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나미는 그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나미는 물을 조금 더 마시다가 상자 안에는 추워서 들어갔다고 말했다. 미인의 표정이 매우 이상하게 구겨지는 것이 퍽 재미있었지만, 마나미는 내색하지 않았다. 생명의 은인 앞에서 건방지게 굴고 싶진 않았다. 그는 컵을 쥔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이제는 아프지 않다고도 말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인 듯 했다. 마나미는 제가 아프지 않다는 것에 이렇게 기뻐하는 그에게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고, 그동안 잘 지냈냐는 말에는 정말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나미의 ‘그동안’은 새하얀 백지와도 같았다. 마나미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그는 그것을 ‘대화하기 싫음’으로 이해했는지, 조금은 참담한 목소리로


   “기분 나빴겠지만, 미안하구나 마나미.”


   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마나미’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듯,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우물쭈물하는 입술은 도톰했다. 좋은 피부에 어울리는 적당한 붉은 기가 있었다. 마나미는 고개를 숙였다. 힘을 주어 시트를 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핏기가 돌지 않을 정도로 세게 쥔 것이 의아해, 마나미는 손을 뻗었다.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자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알던 사이인가요? 라고 물어볼까, 고민했다. 마나미가 다음 행동을 위해 잠자코 있는 시간이 길수록 『토도 선배』는 초조해 보였다. 마나미! 하고 소리치듯 ‘제 이름’을 말하는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마치 금기를 범한 듯 한 표정에 마나미는 얼른 손을 땠다. 미안해요, 라고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자 그는 되려 미안하다 말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먹구름 낀 하늘처럼 암담했다.

   그를 바라볼 때 마다 가슴이 일렁였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마나미는 컵을 비웠다. 물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라고 말하자 미인, 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도 없이 나갔다가, 방에 들어왔다. 물 대신 따듯한 카모마일 차가 놓였다. 그는 마나미가 그것을 다 마실 때 까지 성실하게 기다렸다.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는 동안 마나미는 괜히 초조했다. 그의 눈동자가 저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컵을 손에 쥐었다. 잔향처럼 남은 온기에 딱딱했던 손가락이 풀렸다. 마나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미인은 다시 마나미에게 온갖 모르는 것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반장은 잘 지내는지, 네 팀은 지금 시즌에 달리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왜 이 곳에 왔는지. 여기가 내 집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지.

   모든 문장이 물음표로 끝났다. 마나미는 그저 곤란했다. 볼을 긁적였다. 마나미가 대답할 시간을 주셔야죠, 라고 말한 다음에야 미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듣고 싶다고 말했다. 순서를 정해주는 건 나름의 버릇인 듯 했다. 마나미는 음, 하고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는 여전히 힘을 주어 침대 시트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미 산가쿠’는 그에게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억하고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모두 기억에 없습니다.”


   마나미는 저가 그렇게 말했을 때, 『토도 선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고, 기뻐 보이기도 했다. 동시에 슬퍼 보이기도 했으며, 거짓말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듯 했다. 마나미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으며, 얼마 전 병원에서 나왔다고 대답했다. 무얼 하고 살았는지도 몰라서 무작정 느낌이 오는 데로 걸어 다녔다고 말하자, 미인의 미간은 형편없이 구겨졌다.

   혼날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미안해”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이 너무 자기 생각만 하고 여러 가질 물어봤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미는 그의 손을 제 손으로 포개 덮었다. 그러자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더니, 마나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리저리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을 빗질하듯, 연신. 계속.

   무언가의 주문이나 재인식일까, 생각하며 마나미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게 괴로운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하며 그는 운을 땠다. 마나미는 기억하고 있는 게 없다고 다시 한 번 말하자 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띠에서 삐져나온 앞머리 몇 가닥이 흔들렸다. 역시 이마가 예쁜 사람이었다. 마나미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아 빈 제 손을 스스로 깍지 껴서 잡았다.

   그는 다시 자기소개를 했다. 그는 자기를 『토도 선배』라고 스스로 지칭했다. 아마 ‘마나미’ 보다 몇 살 정도 많은 모양이었다. 위원장에게 연락할까? 라고 묻는 목소리는 상냥했다. 부드럽게 웃으려고 하는 목소리는 살얼음 위를 걷는 것 마냥 위태롭게 들렸다. 위원장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자 토도는 네가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소꼽친구,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도 가슴이 울렁이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계기로, 토도는 마나미가 모르는 에피소드를 늘어놓았다. 누군가의 서사시를 접하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기억에 남는 게 없냐고 묻고 싶은 듯 한 행동이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의사의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절박하고 정중했다. 성인 남자치고는 가볍게 들리는 미성이 담고 있는, 내용 아래의 것들은 수식으로 이뤄진 난제만큼이나 어렵기만 했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한참을 떠들다 『토도 선배』는 마나미에게 물었다. 마나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치료를 더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에, 머리가 다친 건 안라고 대답했다. 무거운 적막이 두사람 사이에 깔렸다. 토도는 무언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역시 위원장에게 연락을 하겠다며 일어섰다. 마나미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무심결의 일이었다. 토도의 이야기 속 위원장은 저를 과보호하는 역할이었다.

   어린애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억만 해 내면 된다고 했어요. 머리에는 이상이 없대요. 절박하게 소리치는 말에, 토도는 다시 그의 옆에 앉았다. 하얀 두 손이 하얀 시트 위에 놓여졌다. 그제야 마나미는 그의 손목을 놓았다. 왠지 그의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떠한 의무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마나미는 눈을 굴리다가, 『위원장』에게 연락하는 건 싫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어째서? 토도는 곧바로 반문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행동이었다. 다분히 본능적이었다. 말로 설명을 하기에 언어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하고 대답했다. 맥락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토도는 잠자코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가만히, 있다가 손을 뻗어 마나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니?


   토도의 말에 마나미는 『토도 선배』의 옆에 있고 싶다고 대답했다. 갑작스럽고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뭔가 생각날 것 같기도 하고, 라며 횡설수설하자 그는 그 말을 성실하게 들었다. 그리고서는 마나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는 이 집에 한 달 정도밖에 머물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저는 의학적 지식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마나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적다는 말이 다가왔다.

   상냥한 말이었다. 그의 옆에 있고 싶었다. 마나미는 그의 예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불안해보였다. 무얼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토도는 계속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언제나 너는 본능적이고 감각적이었어, 라고 말했다. 후회와 한탄이 가득 묻어있는 미련 섞인 말이었다.

   안 될까요? 라고 묻자 안 될 건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널 애타게 찾고 있을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의 손으로 연락을 하고 직접 허가를 받으라는 숙제가 떨어졌다. 그는 얼마 전에 위원장의 번호를 알아뒀던 게 다행이라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무엇이라도 질문해야 할 것 같아 얼마 전에요? 라고 묻자 토도는 가만히


   ―개를 입양 보낼 일이 있어서.


   라고 대답했다. 개를 길렀나요? 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예요? 소라. 소라? 응. 리트리버였고, 유기견이었는데, 아라키타에게 보냈단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집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고, 그리고… 아니, 기억하지 못하지. 괜찮아요, 토도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아니, 아니 괜찮아. 토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은 매우 파리해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너는 펫』의 여자 주인공 같다고 생각했다가, 마나미는 자신이 『너는 펫』의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불쑥, 갑자기 찾아오는 기억에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작은 파도가 발목을 간질이는 느낌과도 닮아 있었다. 찾아오고, 또 다시 밀려난다.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었다.

   마나미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이 사람과 있으면 정말, 다른 걸 기억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토도는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떨리는 손끝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정중하고 상냥했다. 마나미는 그가 무얼 걱정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마나미는 고개를 숙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눈이 깊게 쌓인 하코네 산과 같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밭, 그 시린 풍경을 떠올리다가 마나미는 눈을 깜빡였다. 코끝이 찡해왔다. 눈 안에 눈물이 돌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다시 오물거렸다. 마나미, 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저를 부르는 지, ‘의식’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이름마저 낯설었다. 미안해요, 하고 사과했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그의 손은 제 눈가로 다가왔다.

   손끝이 마나미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고인 눈물이 터진 모양이었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름답고 소리 없는 사람이 떨릴 정도로, 저는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던가. 마나미는 가만히 생각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토도 선배』 사이의 서사를 전혀 알지 못했다. 토도는 지금 자신에게 낯선 타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정도의 거리였다.

   하지만 자꾸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가만히 우는 것을 토도는 지켜보고 있었다. 가만히. 또 가만히. 흘러넘치지 않고 고여 있는 것처럼.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 하라는 말은 구원처럼 들렸다. 이름을 아나요. 서로 불렀던 적이 있나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대로 돌아가는 게 맞는 선택인지도 모르겠어요. 맥락 없이 터지는 질문이었다.

   토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둡고, 그런 만큼 깊게 느껴지는 눈동자에 제가 비치는 것을 마나미는 가만히 응시했다, 토도 선배, 하고 부르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과 눈썹이 이상한 각도를 하는 것이 괜히 미안해 고개를 숙이자, 그는 손을 뻗어왔다. 아까 했던 것처럼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런 얼굴을 하지 마렴, 마나미.


   그의 목소리는 타이르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엄한 목소리였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정중히 꾸짖는 것 같기도 했다. 마나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답 대신 보드라운 이불을 쥐었다. 안 되나요? 라고 묻자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한 표정이었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뚫어질 것처럼 보자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런 얼굴로 보지 마렴, 이라는 말에 사과하자 토도는 고개를 도리질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어도 되냐고 물었다. 지금 타이밍이라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토도는 단호했다. 그는 숨을 들이키더니,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돌아가야지.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라고 말하는 토도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고, 녹아버릴 것처럼 상냥했다. 봄의 햇살, 그 따듯한 결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에 마나미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어리광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명백하게 말하자면 마나미에게 있어 『토도 선배』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초면인 사람에게 이 정도의 부탁을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잊어버린 것은 기억이지 예의가 아니었다. 마나미는 다시 그의 집에 있을 것을 청했다. 토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나가라곤 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연락은 해. 원래 있을 곳으로 돌아가렴. 마나미. 그는 다시 상냥하게 타일렀고, 마나미는 고개를 저었다.

   푸른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토도는 그의 정수리를 쓰다듬다가, 손을 옆으로 내렸다. 그의 귀와 옆얼굴과, 볼을 천천히 건드렸다. 그러고선 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위원장한테는 연락을 해. 널 걱정하고 있을 거야. 병원과도 마찬가지야. 아프면 나을 생각을 하렴. 마나미, 프로는 언제나 만전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이런 내용을 말하는 걸 듣는 건 처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익숙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더 조르려고 했으나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소라?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토도의 뒷모습은 분주해보였다. 소라는 무슨 소라, 이제 사람보다 개가 먼저지? 라고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크게 울렸다. 토도는 귀가 아픈지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그가 이야기하는 소리는 새가 우는 것처럼 들린다. 자그마하게 조잘거리는 목소리는 햇살이 잘 드는 넓은 창 안에 자잘한 빛처럼 고인다. 유리의 잘린 면에서 화사하게 빛나는 볕 같았다. 마나미는 다 닫히지 않은 문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뒤로 누웠다. 다 마신 찻잔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방 안에서는 햇살 냄새가 났다. 토도 선배에게 묻어 있는 향과 비슷했다. 포곤한 향이었다. 천장에 붙어 있는 야광별에서는 아주 약간, 낡은 티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집은 깨끗했고 새로 지은 냄새가 났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다가 몸을 새우처럼 말았다. 고개를 푸욱, 숙였다. 단호한 목소리로 보건데 그는 저를 집 안에 들여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그는 ‘소라’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간간히 꺄르르 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활발하고, 말이 많았다. 제가 봤던, 아까의 ‘진중한 남자’는 거짓말이라는 듯 굴고 있었다. 달의 뒷면을 몰래 훔쳐 본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조용하고, 단호한 토도 선배가 묘하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나미는 코를 킁킁거렸다. 햇살이 들어오는 게 기분이 좋았다. 그는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토도 선배』의 집은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집이었고, 빈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곳이 매우 좋았다. 마나미는 귀를 쫑긋거렸다. 침실에 들어오는 햇살은 저에게 꼭 알맞았다. 선배랑 사이가 안 좋았던 걸까? 라고 생각했지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금의 마나미는 그가 알려주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불을 끌어올려 어깨까지 덮었다.

   차라리 길을 잃어버린 개였다면 좀 더 받아들여주기 쉬웠을까. 그는 이층에 내내 머무르고 있는 토도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와하하, 아라키타여. 네가 그렇게 구니까 소라가 우습게 보는 게 아니냐? 라고 말하는 그의 말투나, 움직임은 어쩐지 머릿속을 애매하게 간질이고 있었다. 마나미는 “멍” 하고, 작게 소리 냈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토도 선배』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집 앞에 쓰러진 사람을 삼일이나 간호했을 정도로 친절하다. 병원에 가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들어줬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어리광을 받아준다. 사이가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던 모양인데도 저를 받아준다. 뭔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상적인 주인이 아닐까. 마나미는 기억하지 못하는 『너는 펫』에 대해 생각하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이불을 내렸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그의 개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상냥한 그의 옆에 있고 싶었다. 소독약냄새가 나고 어쩐지 싫은 부분만을 긁어대는 병원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았다. 마나미는 그가 돌아오길 얌전히 기다렸다. ‘소라’ 사진을 많이 보내라면서 발랄하게 말하던 그는 마나미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토도는 방 문 앞에서 ‘아라키타’에게 무언가를 계속, 주의를 주면서 중얼거렸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그는 문을 열었다. 문지방을 통과하자마자 그는 방금 전의 발랄함은 모두 잊은 채 가라앉았다. 마나미는 그를 응시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 아래로 저를 불편하헤는 게 느껴졌다. 상냥하면서도 불편한 관계란 무얼까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마나미는 몸을 일으켰다. 엎어졌던 찻잔이 다시 움직이다가 데구구르, 침대 밑으로 가볍게 떨어졌다.

   깨지는 소리는 나질 않았다. 하지만 토도는 한 달음에 그에게 달려왔다. 떨어지는 컵을 바르게 세우고 나서 마나미의 손을 잡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저가 다치지 않았음을 알고 있을텐데 그는 깨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을 다루는 것처럼 마나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가, 물기가 일렁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마나미, 하고 ‘제 이름’을 불러왔다.

    심장 한 구석이 애매하게 저려왔다. 마나미는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있잖아요, 라고 말하자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미는 그의 상냥함에 기대고 싶었다. 걱정 했어요? 라고 묻자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잖니, 라고 말하면서 타이르는 목소리가 좋았다. 그냥, 조금 더 듣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용감해질 수 있다. 마나미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미친 소리라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들어줘요 선배, 라고 말하자 토도는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마저 고왔다. 예쁜 모양의 눈썹과 고운 턱선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마나미는 그의 얼굴이 꽤나 ‘자신이 좋아하는 얼굴’이라는 걸 깨달았다.

   타이밍은 지금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나미는 입을 열었다. 지금이 밀어 넣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는 그의 손을 잡았다. 너른 창 안으로 햇살이 숨이 막힐정도로 따듯하게 들어왔다. 늦은 여름의 철모르는 매미 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보다도 크게 들려왔다. 그가 목소리를 내자마자 토도의 눈이 커졌다. 그 유리알 같은 것에 담기는 제 얼굴을 보면서 마나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 그래. 이런 표정을 보고 싶었다.


   “날 개처럼 길러주지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