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토도] 여름. 박하 맛.

*안 사귀는데 키스하는 관계 주의

*HYO린의 Blue moon을 들어주시면 좋을지도 모릅니다.




 


01

그 해 여름.

 

   입을 맞추는 연습을 했다. 순간의 충동이었다.

   첫 시작은 애매한 여름이었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여름의 빈 교실이었다. 평소보다 늦게 나오는 토도를 마중하러 갔다. 연습에 꼭 필요한 것도,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었었다. 그냥 그 날은 기분이 나빴고, 후쿠토미가 찾아오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토도가 곤란한 상황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낮은 목소리가 단단하게 울리던 그 때는 아라키타에게 여름하늘처럼 선명한 색으로 남아 있었다. 이 관계의 첫머리였기 때문이었다.

   불이 꺼진 복도를 걸었다. 그 날은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고시엔이 한창인 계절이었다. 활짝 열린 교무실 창 너머로 요코하마 고교와 도카이 대학 부속 사가미 고등학교의 경기 중계 나오고 있었다. 지지직대는 스피커 너머로 예전 팀메이트의 이름 비슷한 울림이 들렸다.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름이 귀울음처럼 귓속에 딱지처럼 앉았다. 서늘한 곳을 골라 발을 디뎠음에도 불구하고 복도 안은 후덥지근했다. 땀이 교복 안에 입은 티셔츠를 완연하게 적시고 있었다.

   버릇처럼 로진 백 정도의 간격을 남기고 손가락을 비볐다. 사람이 모두 빠진 교사에서는 서늘함의 냄새가 났다. 아라키타는 복도에 남은 종이 뭉치를 발로 찼다. 그것은 데굴데굴, 구르지도 못하고 힘이 빠져 토도의 반 앞에 멈추었다. 어이, 토도. 있냐? 그는 일부러 소리를 크게 냈다. 제 안에 남은 애매한 잔음을 빼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큰 목소리에는 메아리가 달려있지 않았다. 대답 또한 없었다. 그는 문을 벌컥 열었다.


   토도는 교실 안에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의 멱살을 잡은 건 아라키타 반의 여자애였다. 멱살을 쥐어 잡은 손에 실핏줄이 돋아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는 추잡스러운 소리가 났다. 아라키타는 한껏 뻗은 여자애의 발뒤꿈치를 보다가, 토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단순하고, 알기 쉽고, 명쾌했다.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공포와 당황스러움이었다.

   아라키타는 그 순간, 사물함을 찼다. 철제 사물함에서 쩌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물함의 얇은 부분이 우그러졌다. 고민하지 않고 저지른 일이었다. 여자애가 놀라 토도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뒤를 돌았다. 아라키타 군,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방해했냐? 라고 묻자마자 그녀는 그를 지나쳐 교실을 빠져나갔다. 실내화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한참이 지날 때 까지 토도는 가만히, 책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어딘가 혼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눈을 깜박였다. 섬세하게 빚은 도자기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모습은 산백합을 닮아 있었다. 우는 애를 달래는 취미는 없는데,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여자애한테 키스하나 당한 것 가지고, 아라키타는 멀찍이서 그를 바라보았다. 우그러진 사물함 앞에서 그는 망설이듯 머뭇거렸다. 거리를 좁히는 것이 특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다가갈 수 없었다.

   토도는 한참을 울었다. 그는 교복 소맷부리로 눈물을 닦았다. 놀랐냐, 라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한숨을 푹 쉴 뿐이었다. 여자친구냐고 물었더니 그로써는 드물게 아니라고 부정했다. 크게 튀어오르는 목소리는 발라당 까져 있었다. 아라키타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진동을 무시하고 토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끈적한 바람이 불어왔고, 매미가 울고 있었다. 맴, 맴, 하는 소리와 대조적으로 그는 소리 없이 울었다.


   "왜 울어.”

   “아라키타여, 나는.”


   그는 무언가 변명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멱살을 쥐고 있던 여자애의 손등과, 그곳에 돋아 있던 핏줄을 떠올렸다. 아라키타는 토도의 ‘나쁜 버릇’을 떠올렸다. 그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했다.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는 것 마냥 살갑게 굴었다. 그는 목줄을 찬 개였으나 주인 없는 짐승이었다. 그와 친한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무른 일인 지 알고 있었다. 학교 내에서 대대적으로 활동하는 그의 팬클럽은 반쯤, 그와 다른 사람의 선을 그어주기 위해 생긴 집단이었다.

   영악하게도 혼자 남는 시간을 노렸을 것이다. 토도 군, 들어줬으면 하는 말이 있어, 따위의 말을 하면서 꾀었을 것이다.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물렀고, 그런 만큼 충분히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아라키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토도는 한참을 울다가 아라키타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발갰다. 계속 소맷부리로 닦아 낸 탓이었다. 흰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묘한 느낌이었다.

   토도는 울음기 있는 목소리로 아라키타를 불렀다. 아라키타는 구겨진 사물함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어진 선이 있는 것 같았다. 비밀이야,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호구새끼, 라고 말하자 그는 방긋 웃었다. 등신, 머저리, 병신, 아라키타의 비난을 들으면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올라간 입꼬리가 덜덜 떨렸다. 밀어내지 그랬냐고 말하니까 마음이 넘친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거라는 변명이 따라왔다.

   적어도 그 말을 해줄 건 토도 진파치가 아니었다. 꼬리를 말고 도망간 그 애가 해도 들어주지 않을 말이었다.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토도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머리띠를 벗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손으로 결 좋은 머리카락을 빗질하는 소리가 한참 들렸다. 아주 멀리서 크게 틀어놓은 야구 경기 중계가 울렸다. 스피커에서는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라키타는 그와 제 사이의 공백을 바라보다가


    "그럼 왜 울었냐?” 


   라고 물었다. 토도는 가만 그를 바라보다가 그냥, 연습을 한 거라고 생각할래, 라고 대답했다. 키스 연습을 한 것뿐이다, 라고 생각하면 기분이라도 나아질 거라는 궤변이 돌아왔다. 아라키타는 성큼성큼 걸었다. 우는 모습이 괜히 맘에 질척이며 남았다. 비 온 뒤 다 굳지 않은 진흙을 밟을 때처럼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후쿠토미 말을 듣지 말 걸 그랬었다. 괜히 기분만 더러워졌다. 그는 단번에 토도와의 거리를 좁혔다.

   예쁜 얼굴이었다. 그저 고왔다. 아무런 말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꼴이 우스웠다. 놀랐으면 놀랐다, 싫었으면 싫다 말하지 않는 입술이 싫었다.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좋아하는 주제에 싫어하는 걸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짜증났다. 대신 말해줘야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속이 끓었다. 제대로 된 감정은 아니었다. 비틀리고 멋없었다. 순간 울컥했다. 아라키타는 그 여자애가 했던 것처럼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앉아있던 그와 키차이가 났다. 멱살을 잡아올렸다. 힘없이 딸려오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 진득하게 입술울 부볐다. 굳게 닫혀 열어주지 않는 입이 짜증나 입술을 강제로 깨물었다. 읏, 하고 숨을 참는 소리와 함께 열린 입에 제 혀를 쑤시듯 넣었다. 혀 아래를 꾹꾹 눌렀다. 침이 흐르는 지 물기 섞인 소리가 났다. 아라키타는 그를 잡은 손에 무게를 실었다. 몸을 수그리자 토도가 책상에 앉았다. 덜커덕거리는 철제 책상을 배경음 삼아 그는 혀를 섞었다.

   숨과 숨이 나누어지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감각이 아니었다. 아라키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서 박하 향이 났다.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게, 토도 다운 향 같았다. 그 여자애도 그와의 키스를 떠올리면 이 향을 떠올릴 것이라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가슴이 울컥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치받침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그와의 키스에 집중했다. 혀를 얽었다. 예쁜 치열을 훑었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건 어쩐지 불완전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창문에서는 여전히 더운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입술을 땔 때 까지 서로의 호흡을 교환했다. 난잡하게 섞인 숨은 누가 첫머리를 들이켰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입술을 때려 할 때 토도가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은색 실이 연결 되어 있었다. 토도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검은색 눈동자를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먼저 떨어진 것은 아라키타였으나 입을 다시 맞춘 것은 토도였다. 그는 그의 입술에 입술을 부비다가, 입술을 열었다.

   숨을 들이켰다. 입술 전체를 빨아들이다가 윗입술을 빨았다. 쪽, 쪽, 거리는 소리가 난잡했다. 달라붙은 몸과 몸은 끈적거렸다. 그가 입고 있던 얇은 가디건이 목에 닿는 감촉은 부드러웠고, 비벼지는 감촉은 까끌거렸다. 목이 발갛게 달아오를 때 쯤 입술을 땠다. 그것이 뭇내 아쉬워서 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송곳니에 닿아 약한 부분에서 피가 났다. 붉어진 그것과 그의 흰 피부가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토도는 숨을 몰아쉬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아라키타의 이름을 불렀다.


   “이것도, ‘연습’이지?”


   그는 그렇게 물었다. 그가 그렇게 받아들이길 원했음으로 아라키타는 제 속에 끓는 치받침과 모든 감정들을 연습이라는 이름에 갈무리하기로 했다. 딱 봐도 키스 존나 못해서 도망간 거 아냐. 그래서 연습 좀 시켜줄라 그런다, 라는 허세를 앞에 세웠다. 그러자, 토도는 웃었다. 못 말리겠구나 아라키타여, 라고 말하면서 평소처럼 상냥하게 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끈적이는 여름 때문에 앞머리가 이마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아라키타는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자 너는 참으로 상냥하구나,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의 한탄과 체념이 섞인 것 같았다. 아라키타는 괜히 그의 둥근 이마를 바라보다가 엄지로 잡고 있던 중지를 튕겨 그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맞은 자리를 감싸고 억울 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평소의 토도 진파치’였다. 이게 어쩐지 아귀가 맞는 기분이라, 아라키타는 괜히 볼을 긁적였다.


   “상냥하니 뭐니 지랄하지 말고 연습이나 가.”

   “후쿠가 찾아?”

   “어.”

 

   대강 대답하자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매한 길이의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흔들렸다. 그는 먼저 교실에서 나갔다. 뒷모습에서는 소리가 없었다. 요코하마 고교의 무사 만루 찬스를 도카이 대학 부속 사가미 고교가 무실점으로 막았다는 중계가 들려왔다. 크게 틀어놓아 찢어질 것 같은 스피커 소리와 매미 소리, 그리고 간간히 열린 창으로 통과하는 바람 소리가 겹쳐져 귀울음처럼 들렸다. 순간 속이 역겨운 것 같아 그는 한숨을 내쉬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까 찼던 사물함을 다시 찼다. 쾅, 하는 파열음이 다시 한 번 들렸다. 문짝이 너덜너덜해진 아래칸 사물함을 보다가 그는 설렁설렁 걸어, 토도가 빠져 나간 문으로 나갔다. 복도에는 애매한 여름만이 남아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어슬렁대면서 그를 찾았지만 그 날 그를 찾을 순 없었다. 자전거 경기부의 부실에서도 그를 볼 수 없었다. 토도의 안부를 묻는 후쿠토미에게 아라키타는 그 날 처음으로 『못 봤어』 라고, 거짓말을 했다. 비밀이었기, 때문이었다.

 


  


02

비밀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다.

 


   그 날 이후, 입을 맞추는 연습을 했다. 치기어린 실수였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키스를 하고 싶을 때는 분위기가 달랐다. 경기에서 진 것이 아님에도 슬픈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을 때, 아니면 드물게도 자전거 경기부의 연습 시간에 오지 않았을 때, 혹은 토도가 먼저 기숙사 소등 시간 후에 문을 두드리고 말없이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습을 하곤 했다.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연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그 때 토도가 키스를 바란다는 것 뿐이었다.

   여자애에게 강제로 당했을 때는 엉엉 울었던 주제에, 어딘가 맥아리 없는 얼굴을 하고 저를 찾아오는 것이 어쩐지 기쁘기도 하고, 다른 면으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아라키타는 어김없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비밀, 이라는 이름의 그 연습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갖고 있었다. 그와 키스를 할 때는 언제나 박하 향이 났다. 아라키타는 그것이 여름향이라고 생각했다. 토도 진파치는 지극히 여름 하늘 같은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입술과 입술을 마주 대는 것은 어쩐지 의식 같기도 했다. 아라키타의 방에서 키스를 할 때에는 토도는 언제나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클라이머라 그런지 그렇게 무겁지 않은 몸을 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는 것 보다는 약한 것을 그리 쥐듯 안는 것이 취향이었다. 그를 몰아붙일 이유도 없었으며, 골 목전 앞의 스프린트를 하는 것처럼 갈급하지도 않았다. 그와 키스를 할 때는 언제나 두근거렸고, 무언가의 감정이 명치께에 치받치곤 했다.

   라일락 이파리의 맛 같은 느낌이었다. 아라키타는 제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제 목을 끌어안고 있는 그가 좋았다. 그럴 때면 그의 가느다란 척추뼈와 등허리를 쓰다듬다가, 견갑골을 꾹꾹 누르고 싶었다. 그것이 가장 최적이라고 느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토도와의 입맞춤은 언제나 산소가 부족했다.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은 토도였다. 급경사의 오르막에서 댄싱을 할 때도 축이 흔들리지 않는 효율적인 남자가 제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는 것은 상상 이상의 쾌감이었다.

   사이렌이 울리는 것도 같았다.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한 순간 질척이는 감정 한 가운데에 있었다. 키스를 하고 나면 토도는 언제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래서 가끔은 형편 좋은 망상을 할 수 있었다. 예를들어, 그가, 저를, 좋아한다던가, 하는. 그런 애매한 상상들. 그것은 허구의 이름을 하고 있었다. 아라키타의 짐작 밖에 되질 않았다. 토도는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라키타 자신과 달리, 솔직한 사람이었다.

 

   “왜 이런 일을 해?”

   “상관 없잖아.”


   토도의 질문에 아라키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창 밖에서 여름 풀벌레가 울었다. 에어컨이 고장 난 방의 공기는 끈적끈적했다. 온천욕을 마치고 난 다음의 뜨끈거리는 피부를 겹쳤다. 온기와 온기가 닿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 했다. 그는 토도의 견갑골을 쓰다듬었다. 티셔츠 아래로 만져지는 뼈와 근육은 좋은 촉감을 하고 있었다. 변태새끼, 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지는, 이라고 말하면서 아라키타는 다시 그의 입술을 탐했다.

   솔직한 토도는 산을 좋아한다. 도미 오챠즈케를 좋아한다. 키스하는 것도 좋아한다. 아라키타 야스토모는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몇 개라도 늘어놓을 수 있었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려준 것들이었다. 산은 좋아하지만 겨울에 산을 오르는 것은 뼈가 삭는 것 같아 싫어한다. 그는 그의 입 속 살을 혀로 느리게 핥아 올리며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내가 좋아? 라는 물음에 싫어, 라고 대답한다.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 남자가 유일하게 싫어하는 사람. 아라키타는 집요하게 그의 호흡을 괴롭혔다.

   토도 진파치가 정말로 싫어하는 것은 아라키타 야스토모 뿐이다. 그러니 좋아할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은 망상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치받쳐 오르는 감정을 갈무리하는 법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입술을 깨물고, 난폭한 키스를 하고, 연습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옭아매고, 저를 찾아오는 것을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코로 숨을 쉬는 지, 인중께에 텁텁한 숨이 닿아 간지러웠다. 그와의 키스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라일락 이파리의 맛이 났다.


   첫사랑의 맛이었다. 

   그것은 봄, 같기도 한. 혹은, 울컥이고 치받치는 여름 박하의 맛이기도 했다.



 


03.

두 사람의 거리 추정

 

   그 날. 울 생각은 없었다. 교실로 들어온 게 아라키타 야스토모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라키타의 이름을 꾀어 저를 불렀다. 여기서 기다리래, 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라키타의 반이었다. 몇 번 오고가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저를 따로 부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근거렸다. ‘설마’와 ‘혹시’가 첫머리에 오는 것이 어울리는 많은 상상을 했다. 대부분 망상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만약 그녀가 후쿠토미나 신카이의 이름을 빌렸었다면 조금이라도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

   아름답다는 것은 곧, 그것만을 갈구하며 다가오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었다. 토도 진파치는 인생에서 단 한순간도 추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고상하게 아름다웠다. 어렸을 때부터 침어낙안이니 만고절색이니 하는 말을 질리도록 들어왔다. 눈을 마주치면서 한참을 망설이던 사람 또한 숱하게 봐왔다. 강제로 탐하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의 뻔히 보이는 수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은 그녀가 꾀어낼 구실로 삼았던 아라키타 야스토모의 이름 때문이었다.

   좋아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 눈치 챈 순간 계절이 모습을 바꾸듯 아라키타라는 이름을 가진 시간의 한 가운데를 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두근거림이 멎지 않았다. 마음을 잘라내고 애써 감추는 것에 익숙해서 다행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설렘이 있었다. 항상 시끄럽고 마음에 들지 않으며, 미의식조차 없는 남자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눈치 챈 순간 감정은 언제나 절정이었음으로 토도 진파치는 그 시작에 대해서 따로 셈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매사에 생각이 없어보였다. 날선 남자였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진중함과, 아슬아슬함, 위태로움이 자꾸 맘에 밟혔다. 그는 여름이 될 때 마다 기숙사 로비에 나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으면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야구 때문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다. 고시엔에 진출한 1학년 포수가, 아라키타 야스토모를 찾았기 때문이다. 토도는 누군가 그에게 그 사실을 전했을 때의 그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풍기는 그늘마저 좋았다.


   그녀에게 아라키타의 이야기를 물었다. 왜 그가 저를 불렀는지를 계속 궁금해 했다. 그녀는 그러자 멱살을 잡아왔다. 어이가 없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발 뒤꿈치를 들고 키스를 해왔다. 입술이 억지로 맞대어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입술을 벌려주지 않자 강하게 깨물었다. 밀쳐낼 수 있는 상대였는데도 너무나도 놀란 것은, 사랑에 빠진 상태로 사랑을 회상하고 망상하고 있는 과정을 방해받았기 때문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그 때, 눈이 마주쳤다. 아라키타가 교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토도와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사물함을 발로 찼다. 강한 파열음과 함께 그녀가 놀랐다. 아라키타 군, 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고 있었고 아라키타는 방해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놀란 듯 토도를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고 나가버렸을 뿐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교실 안에 묵직하게 남아 있었다.

   너무 놀랐는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마법 같은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너무나 잘 맞는 퍼즐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성을 잡아야하는데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울었다. 조금 억울했다. 키스 당한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익숙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오해받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마음이 일렁였다. 여름 한 낮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 같은 모습이었다.

 

   “여자친구?”

   “아니야!”


    소리 지르듯 대답했다. 마냥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자 아라키타는 놀란 듯한 얼굴로 아, 그래. 라고 대답했다. 그 말 이후 그는 말을 걸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토도가 우는 소리만 잔향처럼 남아있었다. 후텁지근한 여름의 바람이 불어왔고, 아라키타의 주머니에서는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윙윙대는 그것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더 억울해졌다. 누구를 탓할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견디기 어려웠다. 짝사랑 하고 있는 남자의 앞이었다.

   치졸하고 졸렬했다. 마음이 점점 좁아졌다.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놀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런 형태로 그를 기다리고 싶진 않았다. 놀란 마음에 들이찰 것은 그에 대한 애매하고도 두근거리는 감정들과 미묘한 사랑뿐이었다. 라일락 이파리의 맛이 났다. 혀가 소태를 씹은 것 마냥 썼다. 첫사랑의 맛이었다. 숨을 들이킬 때 마다 코끝이 아팠다. 가슴에 치받치는 억울함을 풀 길이 없었다. 입었던 가디건이 얼굴을 쓸 때마다 그저 쓰라렸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기분이었다. 중력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망하고 혼란스러웠다. 그가 묻는 말에 대충, 연습이라고 생각할래 라고 이상한 대답을 했다. 대답을 들은 아라키타는 매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성큼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토도의 멱살을 쥐었다. 입술이 다가왔다. 립밤이나 립크림 따위를 한 번도 발라보지 않았을 거친 입술이 제 입술을 훑을 때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찔했다. 심장소리가 삐져나와 그의 귓가에서 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키스는 포식자를 닮아 있었다. 침샘을 깊게 누르고 숨을 모두 약탈하려는 것 마냥 굴었다. 그녀와의 입맞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저를 몰아갔다. 골 앞의 스프린트가 생각나는 느낌이었다. 위험한 향이 났다. 저를 옭아매버리는 듯, 몰아세우는 것이 좋았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손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어서 꽉 쥐었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이 손바닥 안에 깊은 자국을 냈다.

   이어지는 입맞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입술을 때고 눈을 마주쳤다. 그의 작고 날카로운 눈동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었다. 아라키타의 이름을 불렀다. 이것도 연습이지? 라고 묻는 목소리가 야했다. 아니라고 대답할 재간이 없었다.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키스를 못 해서 도망간 거 아냐? 하는 빈정거림이 찾아왔다. 온 몸의 피가 싸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결국, 장난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바보가 되는 장난은 잔인했다. 순간이었지만 대답을 고민했다. 언제나 내놓을 수 있는 건 친구의 이름 뒤에 숨을 수 있는 선택지 뿐이었다. 짝사랑은 언제나 용기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호흡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했다.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이상해질 것 같았다. 대화의 템포를 놓치지 않아야 했다. 그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드럽게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못 말리겠구나. 아라키타여.”

 

   라고 말하자 그는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땀이 잔뜩 나 있었다. 그의 손길은 자칫 착각할 만큼 다정했다. 상냥하구나, 라고 말하자 그는 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묘하게, 기대하게 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토도는 미련하지 않았다.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 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조금의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라키타 야스토모라는 남자가 다정하기 때문이었다. 싫어한다, 짜증난다 말하면서도 묵묵히 좋아하는 이면을 좋아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먼저 교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걸었다. 여름 냄새가 복도에 퍼져 질식할 것 같았다. 그와 키스했다. 입맞추었고, 숨을 나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을 할 수 없었다. 복도를 걷다가 쓰러질 것 같아 아무 빈 교실에나 들어갔다. 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귓가가 먹먹해졌다. 그 날의 첫사랑은 귀울음으로 왔다. 먹먹한 숨을 참으며 교실에 쪼그려 앉았다. 빈 교실의 책상다리와 의자다리들이 어지럽게 눈에 들어왔다.

   아라키타는 토도가 있는 교실을 지나, 부실로 곧장 간 듯 했다. 그는 그가 지나갔던 자리를 밟아 지나가나가, 기숙사 쪽으로 들어갔다. 입술이 신경쓰였다. 손가락 끝이 그와 마주대었던 입술에서 떠나질 않았다. 키스하고 싶었다. 끌어당기고 싶었다. 연습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숨결을 탐하고 싶었다. 이 모든 이름은 짝사랑과 첫사랑이라는 풋내나는 감정들의 뒤안길이었으며, 동시에 그림자였다. 질척거리는 마음이 울컥이고 치받쳐서 숨을 막아왔다.

 

   그 날 이후, 연습을 했다. 숨을 겹쳤다. 연습이라는 이름을 빌려 휘두르는 장난에도 불구하고 아라키타는 토도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것이 일말의 기대처럼 느껴졌으나, 토도는 그가 저를 좋아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아라키타는 좋아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야구를 싫어하고, 연습을 싫어한다. 자전거를 타는 것도, 배팅 센터도 싫어한다. 그리고 토도 진파치 또한 싫어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싫어하는 것은, 토도 진파치 뿐일 것이라 토도는 확신하고 있었다.

   연습이라는 거짓말을 누가 믿을까. 토도는 제 눈 앞의 아라키타를 바라보았다. 그의 허벅지에 무게를 실어 앉았다. 제 등허리와 견갑골을 더듬어오는 그의 손가락을 느끼다가 몸을 밀착했다. 그에게 체중을 실었다. 숨과 숨을 더 깊게 마주 대었다. 그를 끌어 당겨 작은 틈도 없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이 어리광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그가 왜 받아주는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런 식으로 사랑에 용기 없는 남자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토도는 그의 입술에 다시 숨을 겹쳤다. 입 밖으로 소리가 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키스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도록 굴었다. 이것이 그가 저와 그 사이에 그어놓은 마지막 경계라고 생각했다. 토도는 영리했음으로 그것을 넘지 않았다. 그와 입을 맞출 때 마다 여름 냄새가 났다. 질식할정도로 라일락을 닮은 향이었고, 그것을 들이킬 때 마다 토도는 아득해지며 저가 그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하는 것이었다.

   코로 숨을 쉬는 지, 인중께에 텁텁한 숨을 내뱉었다. 눈을 슬며시 뜨자 아라키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눈치를 봤다. 입술을 때지 않은 채로 그의 숨을 탐했다. 사랑한다고 목소리를 실어 말하지 않았다. 키스로 전달 될 수 있는 감정이 있을까, 생각하며 토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두워지는 시야 속, 끌어안은 그를 한껏 더듬었다. 언제 잃어버릴지 모르는 여름, 그 한철의 계절 같은 한시적인 연습. 아라키타와의 키스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라일락 이파리의 맛이 났다.

   첫사랑의 맛이었다. 봄, 같기도 한. 혹은, 울컥이고 치받치는 여름 박하의 맛이기도 했다.



'Cosmolog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나토도] 그 해 여름 소년 2  (0) 2018.10.28
[마나토도] 그 해 여름 소년 1  (0) 2018.10.28
[유우아시] 왼손 악보와 오른손 악보 사이  (0) 2018.10.28
[마키칸] Rubato  (0) 2018.10.28
[마키칸] 開  (0) 2018.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