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토도] 그해 여름 소년 9

프로 로드레이서 마나미 x 프로 로드레이서 토도 

연령, 미래 조작, 기억상실 요소 있음. 







"함께 있으면 계절은 느리면서도 착실하게 지나가고."



***


   별거 아닌 아침이었다. 토도는 눈을 떴다.

   새벽 내내 돌아다닌 것의 여파인지, 온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자고 있는 마나미를 바라보았다. 마주보고 있는 거리가 좁았다. 숨소리와 심장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는 거리였다. 창문 틈 새로 들어온 햇볕이 그의 파란색을 더 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토도는 그 색을 한동안 내내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가만 흘러가는 시간을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홀려 있었다. 

   간밤 새벽은 내내 더웠다. 스스로 깍지를 끼고 있는 마나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품을 벗어나는 건 언제나 토도의 일이었고, 이에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그는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에어컨을 틀었다. 그가 춥지 않게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주었다. 새근새근 자고있는 마나미의 숨소리는 마냥, 아득하게 들렸다. 아침, 또 다시 아침이었다. 

   어제 밤은 마냥 꿈만 같았다. 축제의 불꽃놀이는 언제나 사람을 그 시간 속에 가둬버리곤 한다. 모든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토도는 눈을 비볐다. 마나미는 좀 더 잘 것이다. 그는 새벽 체질이 아니었다. 기억을 잃어도 몸에 남아있는 것은 여전한지, 마나미는 잠이 많은 편이었다. 어린애 같아서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아직도 남아 있는 버릇을 그리워하고, 동시에 씁쓸하다고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마음을 저미곤 했다. 토도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나미는 새벽 내내, 토도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미안해, 라고 말하자 나는 선배의 개인걸요. 착하고 상냥한 개. 라고 대답했다.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입술을 입 안으로 숨긴 채, 깨물고 있으려니까 그는 다시 좋아해요, 라고 말했다. 좋아? 라고 되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한다―의 좋아한다, 에요. 라고 되짚는 목소리는 심해마냥 깊었다.

   한없이 천진했다. 끝없는 파랑이 이어지는 여름 하늘 마냥. 

   도망가질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은 언제나 떠나고 난 뒤에 후회처럼 찾아온다. 토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굳게 잠가둔 방문을 열었다. 혹여 뒤늦게 깬 마나미가 들어오지 않게 문을 단단히 잠근다. 작은 창을 빼고 하루 종일 닫아두는 방에서는 특유의 먼지 냄새가 났다. 손을 엑스자로 교차시켜 티셔츠를 벗고, 트렁크 팬티를 아래로 내렸다. 발이 지끈거렸다. 목욕이 나은가? 생각하며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머리끈을 선반에 내려놓았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았다. 미지근한 물을 한참 맞고 있다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눈을 깜빡일 때 마다 눈알이 아팠다. 눈을 비비면서 얼굴을 씻었다. 샴푸 거품을 내서 두피부터 천천히 거품을 냈다. 긴 머리카락을 감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일본을 떠나기 전에 잘라버려야지, 생각하면서도 어째 자르기가 쉽질 않았다.

   변화, 는 싫다고 생각한다. 남은 며칠 동안을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샤워를 했다. 파란색 바디워시를 샤워 볼에 묻혀 거품을 냈다. 하얀 거품이 피어날 때 나는 진한 ‘파란 향’은 어쩐지 마나미를 닮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다시 돌아갈 때 쌀 짐들을 떠올렸다. 거의 모든 걸 버리고 갈 예정이었다. 짐을 정리하면 캐리어 하나 정도를 겨우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대한 남은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나중의 마나미가 찾으래야 찾을 수 없도록 간소하고 단촐하게. 미움 받는 건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기간 동안 그가 기억을 찾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일이었다. 그는 마나미가 자신을 그해 여름에 온 낯선 손님, 정도로 생각해주길 바랐다. 한숨을 내쉬었다. 깊고 깊은 숨이었다.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뜨거운 물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여름은 이제 곧 저물고 가을이 올 텐데도, 아직 볕은 따가웠다. 팔월 말. 인터하이가 끝날 시기. 토도는 자신이 언제나 그의 앞을 달리기로 했던 선택을 반추했다. 하지만 후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를 만난 후 토도 진파치의 인생은 모두 선행하여 달리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게, 제 나름의 사랑이었다. 비틀린 방식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랬기에 마나미는 사랑했음에도 외로웠던 것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카락과 몸에 묻은 거품을 씻어냈다.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생각이 너무 많아진다.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언제나 경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나미는 제 세계를 흐트러트렸다. 

   마나미가 지나간 궤적에는 언제나 떨림이 있다. 홀릴 정도로 지켜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모든 의지는 그의 존재로 인해 재정립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자유로움이 천천히 족쇄처럼 매이는 게 보인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바라는 것이 많아진다. 그것들은 마나미의 레이스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감각들이다. 토도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선배로서 그가 ‘자유롭게 달리기’를 바랐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에 후회가 없어야 한다. 토도는 폼을 비벼 비누 거품을 냈다. 파란 향이 코 끝에 훅, 끼쳐왔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은 끝이 없는 후회 속에 잠기는 일이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물이 닿는 곳에 묻었던 거품이 천천히 몸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미련 또한 이런 식으로 흘러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는 배수구로 들어가는 거품과, 흘러가는 물 따위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수천, 수억을 반복했던 망상이었다.


   샤워를 하고 난 후에는 머리카락을 말렸다. 빛이 들어오는 곳에서 부유하고 있는 먼지들은 성운星雲처럼 보였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문이 잠긴 걸 확인하고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대충 아침을 만들다보면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가 제게로 올 때면 언제나 주변 공기가 바람처럼 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마나미는 언제나 잠에서 일어나면 제게로 다가와서 이름을 부른다. 토도- 선배- 라고 말하면서 눈을 비빈다. 식탁에 앉아서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한다. 저혈압인 건 아니라지만 원채 잠이 많은 탓이었다. 그런 모습이 갓 깬 새끼 강아지 같다고도 생각한다. 그런 그를 놔두고 한동안 샐러리를 자르고, 양상추를 뜯고, 치커리를 다듬고 있다 보면 다시 이름을 불러온다.


    “토도 선배-”


   하고. 그러면 고개를 들고 반짝반짝한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는 마나미가 있다. 토도는 그가 자신을 부르는 호흡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듯한 목소리에, 토도는 매정하게 뒤를 돌았다. 안 돼, 라고 말하면서 방금 손질한 야채들을 원목 볼에 담았다. 


   “치사해.”


    『소라』한테도 이랬어요? 마나미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너는 사람이잖아, 라고 말하니까 아주 나는, 자기 좋을 때만 멍멍이지? 라구 물어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좀 더 건방진 느낌이라 허탈함에 허, 하고 헛웃음을 짓자 그는 얼르은- 하고 말꼬리를 늘여왔다. 보이지 않는 개의 꼬리가 반갑게 흔들리고 있는 듯 했다.

   방울토마토 팩을 포장을 뜯던 걸 멈추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눈을 마주치자 좋아해요, 라고 말해오자 얼굴을 찌푸렸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라고 묻자 마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보러갔던 불꽃놀이, 여름 끝물의 축제 안에 아직도 갇혀 있는 지분이었다. 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의 손에 방울토마토 팩을 내려두었다.


   “이거 말고-”


   마나미는 부드럽게 졸랐다. 눈을 마주치자 은근히 눈웃음을 쳐왔다. 일학년 때 같아, 라고 무심결에 중얼거리자 마나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토도 선배- 하고 다시 이름을 늘여 부르자 토도는 하는 수 없이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천천히 정수리 부근만을 쓰다듬다가, 깊게 뒷머리까지를 쓸어내린다. 토도의 손바닥에 마나미는 머리카락을 부비다가, 다시 멈칫하다가 다시, 애교 있는 강아지마냥 굴었다. 

   만족했으면 방울토마토나 열어주렴, 마나미. 토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뒤를 돌았다. 마나미가 토마토 팩을 까는 소리가 들렸다. 샐러드 볼에 넣어요? 라고 묻는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라고 질문하자 그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냥, 조금. 인식하니까, 떨려서. 라는 대답은 너무나도 감각적이라, 토도는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어색하게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진다니, 그렇게 밀어낸 사람이랑, 다시 한 번. 토도는 시선을 내렸다. 그는 제 손 끝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과 투명하게 들어오는 빛무리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그의 ‘첫사랑’이 자신이라면, 모든 걸 알고 있는 자신이 거절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밀어내지 못하는 것은… 토도는 자신의 감정이 매우 모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결별을 준비한다. 토도는 그의 머리카락에 다시 손을 올렸다. 토도 선배? 라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오는 그의 목소리 끝이 까졌다. 형편없이 긴장한 듯 했다. 토도, 선배, 하고 마나미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토도는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금 쓰다듬다가, 한숨을 내쉬며 조리대로 다가갔다.


   “뭐가 먹고 싶어?”

   “카이세키 요리?”


   장난치지 말라는 뜻으로, 마나미이- 라고 부르자 마나미는 삿포로 식이 좋다면서 웃었다.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눈썹 또한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말랑말랑한 푸딩 같은 얼굴이었다. 토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나미는 눈을 마주쳐왔다. 그는 장난스러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토도의 머리카락 끝을 잡아, 엄지와 검지로 쓰다듬다가 토도가 무어라 말하기 전 얼른 놓았다. 장난의 거리감을 재는 듯 했다.


   “하루 지나서 밥 먹게?”

   “으음, 그럼 스프 카레.”


   야채가 잔뜩 들어있고 루가 물처럼 되어있는 거요. 닭고기 넣어줘요. 마나미는 방울토마토의 꼭지를 까면서 대답했다. 여관 음식보다는 간단한 오더였다. 토도는 냉장고를 열었다. 어째 있는 재료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장을 따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마나미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쭈욱 빼면서 냉장고의 거의 비어 있는 야채칸을 보다가 장 보러 안 가요? 라고 질문했다.

   토도는 곧 있으면 집에 가거든, 이라고 말했다. 마나미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럼 나도 따라갈까?, 라고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한 말이었다. 토도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싫어, 라고 대답했다. 마나미는 나는 선배의 개인데? 라고 다시 한 번 물었다. 토도는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스테인레스 볼에 물을 담고 아스파라거스와 여주, 가지와 양파 따위를 꺼내 놓았다. 그는 물기가 남은 손을 탈탈 털었다.


    “마나미. 나는 너를 잠시 맡아주고 있는 거야. 임시 보호라고.”

   “임시 보호 치고는 정 많이 들었잖아요.”


   우리. 마나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답하지 못하는 토도를 보면서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원래부터 약속 했잖아, 라고 말하는 토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나미는 턱 한쪽을 괸 채로 나름대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토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시키마’ 정도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여름의 햇살은 부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토도는 뒤를 돌았다. 허리에 손을 짚었다.

   예쁜 얼굴. 마나미는 눈을 마주치면서 실실 웃었다. 그의 앞치마 색은 짙은 인디고였다. 원목 도마와 세라믹 칼. 햇볕이 가득 들어오는 부엌. 마나미는 그 모든 것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집, 선배가 지었다고 했었죠? 라고 확인하듯 묻자 그렇다 마나미, 라는 대답이 고민하지 않고 들려왔다. 마나미는 그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가요? 라고 묻자 토도는 응, 하고 대답했다. 그는 잘 씻은 가지를 한 입 크기로 숭덩숭덩 썰었다.

   별거 아닌 아침이었다. 마나미는 출국하는 비행기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니까 알려달라는 통에 거절할 수 없었다. 토도는 그에게 앞으로, 약 삼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둘러댔다. 마나미는 한동안 화가 난 것처럼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다가, 제 두 무릎을 끌어안고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유기견이 된 기분이에요. 그는 뾰족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잖아.”

   “그래도 토도 선배의 개죠.”


   거두고 정을 줬잖아요. 다시, 좋아하게 만들었잖아요. 마나미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는 손을 뻗었다. 미동 없는 토도의 손가락을 잡았다. 손과 손을 엮었다. 제게로 가져와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물기 없는 입술의 버석한 입맞춤. 그는 맥이 닿는 곳에 키스를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지, 아니면 혼을 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마나미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좋아해요.

   그의 시선은 여름의 습기처럼 눅눅하다. 며칠 전의 청량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등줄기가 스산했다. 에아콘 때문은 아니었다. 설마, 라는 의심이 여름 한낮의 그림자처럼 길게 내려왔다. 구름이 태양을 가렸는지 집 안에 그늘이 가득 찼다. 토도는 마나미가 잡고 있는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마나미, 너, 라고 운을 땠다. 마나미는 방긋방긋 웃고 있다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했다.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뻗어 마나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애초에 기억을 찾았다면 자신의 옆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토도는 다시 뒤를 돌려고 했다. 마나미는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을래요. 라고 조르는 그의 웃음은 어쩐지 스산했다. 좀 더 궁금한 게 많아요. 밥 같은 건 됐어, 선배랑 이야기가 하고 싶어. 마나미는 속삭이듯 말했다.

   토도 진파치는 마나미 산가쿠에게 약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응석을 받아주고 싶어 한다. 그가 조르는 것이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면 그렇게 해주고 싶어 했다. 마나미는 그를 잡아당겼다. 힘없이 끌려오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배에 귀를 대고 가만히 있다가, 그를 올려다보면서 등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집안에 들어온 그늘은 가시지 않았다.


   “마나미.”

   “네.”

   “놓아.”


   마나미는 그의 날갯죽지를 꾹꾹 눌렀다. 고개를 저었다. 마나미. 하고 다시 그가 이름을 불러왔다. 싫어요. 라고 말하자 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미,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거란다. 나는 원래부터 한 달만 일본에 있기로 했었고, 그동안 후배인 널 맡아준 것뿐이며, 원래 정해진 게 있으니까 헤어지는 것도 당연한 거야. 알고 있잖니. 응? 토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달래듯, 등을 토닥였다.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닌데요.”


   그의 두 손이 가지 말라는 듯, 날갯죽지를 꾹, 누르다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힘없이 걸쳐져 있는 두 팔인데도 놓을 수 없었다. 투정 부리지 마, 라고 엄하게 말하자 마나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만히, 그에게 떠나는 건 토도 선배에게 그냥, 이사 이외의 의미가 없는 거냐고 질문했다. 토도는 응, 하고 대답했다.

   남겨둔 것들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다시 돌아오느냐 질문했다. 돌아오지 않을 거야. 토도는 대답했다. 그러자 마나미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 토도의 이름을 부르다가 문득, 처음부터 그것을 물어보고 싶었다는 양 조심스럽고도 섬세하게, 프랑스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도 아니야. 토도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돌아가는 건 선배가 선수이기 때문이지요? 남은 시즌을 공칠 수 없으니까. 마나미는 대답이 듣고 싶다는 듯 굴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토도는 그래, 하고 말했다. 그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애착인형을 잃어버린 강아지처럼 울었다. 소라가 생각났다. 토도는 가만히 그의 어깨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였다. 체온이 닿을 때 마다 마나미는 그를 힘주어 끌어안았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있어요?”


   여태까지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을 물어보고 싶다는 듯, 그는 속삭였다. 토도는 가만히 그의 어깨를 끌어안다가, 그래. 라고 대답했다. 스스로 내뱉으면서도 삐걱거리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마나미는 그의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이냐는 듯, 깜빡이는 눈동자에 토도는 말없이 그의 볼을 잡아당겼다.


   “이제 질문 타임은 끝이야. 밥 해야 해.”

   “싫어.”

   “오늘 따라 왜 그래.”

   “싫어요.”

   “마나미.”

   “선배도 선배 마음대로 하잖아요.”


   마나미는 그를 잡고 놓지 않았다. 그가 앉은 식탁 의자가 흔들렸다. 토도는 뒷걸음질 쳤다. 몇 걸음 물러선 것 같은데도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그가 강하게 붙들고 있는 탓이었다. 마나미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체향이 코끝에 번졌다. 산 같은 프레시한 향이라고 생각하면서 숨을 내뱉었다. 선배, 라고 부르며 그를 조른다. 마나미는 토도에게 약한 부근을 파고든다. 밀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 본능적인 움직임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까. 토도는 정상에 대한 갈망과 비슷해 보이는 마나미의 이 욕망을 저지할 수 없었다. 좋아해요, 그는 다시 속삭였다. 그것이 무언가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토도는 그를 토닥였다. 아직, 가지 않는다, 마나미. 라고 말했다. 한참을 쓰다듬고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새 다시 부엌 안으로 진한 여름 햇볕이 들어왔다.


   마나미는 손을 풀었다. 토도는 두 걸음 물러섰다. 선배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불안했어요, 라고 말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알고 싶었어요, 라고 고개를 숙이는 그 애는 아이러니하게도 토도가 그간 겪었던 여름을 닮아 있어서, 그는 손을 뻗어 다시 그를 쓰다듬어주며 ‘괜찮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뼘 정도의 키 차이가 있었다. 이게 거의 없던 때도 있었다. 순간, 그의 향이 훅 끼쳐왔다. 마나미는 여름을 닮아 있었다. 그는 파도처럼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작은 소리를 내더니 물기 없이 비볐다. 허락을 구하는 듯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선배가 하지 말라면 안 할 거예요. 마나미는 칼자루를 그에게 내밀었다. 토도는 그를 들여다보았다. 눈동자에 서려있는 욕망은 몇 해 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좋아해요, 라고 어제 말했다 마나미. 라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마나미는 다시 안 되나요, 하고 물었다. 하지 말라면, 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울음을 닮아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마나미는 그에게 기대어 있다가, 살아 있는 것 같아, 라고 속삭였다. 나랑 있어도? 라고 묻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토도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토도 선배, 토도, 선배. 토도… 선배. 그는 안달이 난 강아지처럼 이름을 불렀다. 좀 더 닿고 싶어요, 라며 서툴게 뻗어온 손을 그는 밀어낼 수 없었다.

   입을 맞추었다. 숨을 나누었다.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숨을 엮었다. 마나미는 토도의 입술을 핥았다. 입을 벌리자 혀를 엮었다. 산 정상에서 그를 몰아가는 것처럼, 미련에 키스를 남겼다. 타액과 타액이 섞이는 추잡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마나미는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명백하게 느껴지는 욕망에 토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후회 할지도 몰라. 그는 속삭였다. 어느 순간 칼자루는 마나미에게 가 있었다. 마나미는 손을 뻗었다. 토도의 가슴에 올렸다. 손가락 끝에서 두근, 두근, 두근, 거리는 맥이 느껴졌다. 그는 언제나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살아있다고 느끼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무구한 어린애처럼 그는 속삭였다. 토도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그는 다시 속삭였다.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할지도 몰라.”


   토도의 말을 듣다가 마나미는 가만히 웃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생에는 어느 순간도 단 한번이에요.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아요. 그렇게 속삭이는 그의 입술과, 눈동자와,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제가 알고 있지만 알고 있지 않은 마나미 산가쿠. 토도는 그의 볼을 쓰다듬다, 눈을 감았다. 다시 한 번 여름 같은 입맞춤이 찾아왔다.

   허리로 손을 가져가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거실의 소파까지 닿은 입술을 때지 않았다. 안을 거예요, 그는 속삭였다. 끝까지 선택하라는 듯,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듯. 후회할 거야, 라고 다시 한 번 말하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선배가?”


   라고 물었다. 그 말에 쉬이 대답할 수 없어 숨을 고르고 있자


   “아니면 내가?”


   라고 다시 한 번 질문했다. 토도는 말을 잃어버려 입술을 뻐끔거렸다.  마나미는 토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는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움직일 수 없었고, 저항할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순간이었다. 시야에 가득 들어온 그가 보였다.

   제게 쏟아지는 열기는 마치 한여름의 태양 같아서, 미처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뛰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간절하게 다가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입술을 마주 대다가, 다시 혀를 섞었다. 진한 키스를 하며 티셔츠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맨살을 더듬었다. 눈이 마주칠 때 마다 서로의 숨을 탐했다. 세게 뛰는 심장이 낯설었다. 꼭, 살아있는 것 같았다.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밀어내지 못하는 것은, 그와 닿은 온기를 여전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발목을 적시고 부서지고, 또 다시 닿아오는 그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토도는 눈을 꼭 감았다. 눈꺼풀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후회하지 말아요. 사랑하는 건 내가 할게요. 그는 그것에 제 역할이라는 듯 속삭였다. 

   흘린 땀에 소파의 가죽이 붙었다. 쓸리는 피부에는 붉은 열락이 피었다. 그는 제 머리카락을 들어 키스했다. 예뻐, 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욕망이 짙게 묻어 있었다. 영원히 여름만을 걷고 싶었다. 한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후회하게 될 거야, 라고 자신 없이 속삭였다. 토도 답지 않은 일이었다. 마나미는 다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여름의 끝 마냥 깊었다. 





***


   쿠로다는 계단을 한 걸음에 밟아 올라갔다. 카페의 문을 열었다. 가게 문에 달려있는 종이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그는 성급하게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산세베리아와 해피트리를 세우고 가림막을 세워 분리한 가장 구석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그 뒤로 들어가자마자 아시키바는 태평하게도 바빠 보이네- 라고 말했다. 쿠로다는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장 바깥 자리에 앉아있던 유토가 물을 건넸다. 쿠로다는 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평소보다 과속해서 달렸다. 레이스 같은 기분으로, 속도 제한을 지키지 않는 하코네의 검은 고양이 배달부처럼. 쿠로다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시키바는 그에게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카페 안의 에어컨은 삐걱삐걱, 낡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땀을 닦았다. 그리고 서툴게 숨을 섞어서 말한다.


   “찾았대.”

   “뭐를요?”


   유토가 질문했다. 쿠로다는 숨을 다시 몰아쉬었다. 폐 안에 들어있는 공기를 모두 뱉어버릴 것처럼 굴었다. 마나미. 찾았대. 방금 미야하라한테 전화 받았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흐른 땀을 닦았다. 먼저 소리를 지른 건 도바시였다. 어디서? 어디서 어떻게 찾은 거야, 어디 있었대? 이즈미다는 연신 질문했다. 쿠로다는 숨을 돌렸다. 빈 유리컵에 유토가 물을 따라주었다.


   “전화 왔대.”

   “보이스피싱 같은 건 아니지?”

   “미야하라가 너냐, 타쿠토.”

   “아하하.”

   “아무튼, 찾았대.”

   “다행이야….”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등받이에 허리를 이상하게 기대고 앉았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온 몸에 맥이 다 풀린 탓이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목소리인지 모를 다행이다, 다행이야, 같은 소리가 공기에 풀어졌다. 낡은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쿠로다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도바시는 얼굴을 손으로 닦았다. 

   쿠로다 몫의 커피를 가지고 오던 점원이 많이 더우시냐 물었다. 이즈미다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쿠로다는 의자에 제대로 앉을 수 있었다. 어디 있었대요? 라고 도바시가 질문했다.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까져 있었다. 쿠로다는 뒷목을 쓸었다. 맞아, 어디 있었대? 아시키바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게.”

   “네, 그게요.”


   유토는 말꼬리를 잡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이즈미다는 쿠로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큰 두 눈을 바라보다, 쿠로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밝힐 수 없대. 라고 말하자 도바시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면서 소리 질렀다. 몸값 요구라도 하는 거야? 통화를 더 하기 위해선 돈을 가져와야 하는 거야? 아시키바는 당황해서 아무런 말이나 막 내뱉었다. 워, 워. 다들 진정해. 쿠로다는 양 손바닥을 그들에게 보이면서 허공을 두어 번 두드렸다.


   “한동안, 밝힐 수 없대.”

   “무슨 말이 그래?”

   “안전하긴 해? 보이스피싱 아니야?”

   “건강하고 안전하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는 잘 살고 있대. 그리고 어차피 물어봐도 대답 안 할 거니까, 애초에 어디 가 있었는지 묻지 말아달라고.”


   도바시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모두가 그런 기분일 것이다. 기억이 돌아왔으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는 해외 진출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선수였다. 몸에 이상이 있는지 검진을 받아야하고, 걱정했을 가족과 미야하라에게 눈도장을 찍어야만 한다. 그래야 하는데, 마나미는 그러지 않았다. 쿠로다가 알고 있는 그는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이었지만, 이정도로 상식이 없을 줄은 미처 몰랐다.


   “부하, 진짜 이상하네.”

   “정말요.”


   아시키바는 가만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뭔가 마나미 답다.”


   말을 끝맫고 난 다음,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쓸어내렸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쿠로다는 그제야 제 몫의 커피에 손을 댔다. 몇 번이고 숨을 고르고 나서야 그녀가 전해달라는 말이 떠올랐다. 쿠로다는 미야하라가 그동안 전단지 붙여주고, 여기저기 물어봐주던 거 감사하대. 마나미도 고맙다고 했어.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이라고 말하면서 볼을 긁적였다. 역시, 뭔가 마나미다워. 아시키바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창 너머에서 늦여름을 알리는 매미가 울었다. 알릴 수 없기는 무슨 알릴 수 없다는 거야. 하고 도바시는 꿍얼거리듯 말했다. 그의 미간에는 여전히 주름이 가 있었다. 유토는 웃는 낯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하야토 군한텐 말 안했죠? 라고 묻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선배들에게도 어서 전해줘야겠다면서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허무한 건 아니었지만, 온 몸에 찾아온 탈력감이 사라지려 하질 않았다. 이야기를 하려다가도 다시 한숨을 내쉬고, 책상에 얼굴을 묻었고, 가끔씩은 등받이에 힘없는 모양으로 허리를 기대면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일에 진척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간간히 맥이 끊길 대마다 도바시는 우리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 라고 묻고, 이즈미다가 ‘신카이 선배가 귀국했다는 이야기’라고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진행되는 게 전혀 없었다.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시키바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미지근해져 밍밍해진 커피를 마시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꼭 뭔가, 기시감이 들어. 라고 말한 그는 카페에 깔려 있는 쇼팽의 소나타를 한참 듣고 있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손마디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쿠로다는 아시키바를 바라보았다.


   “꼭 토도 선배 떠날 때 같아.”


   아. 쿠로다는 순간 탄식을 내뱉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모두들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머쓱해졌다. 그 때도 아무것도 몰랐잖아, 라고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었다. 유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바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가 거슬려 짜증을 냈다.



   도바시 마사키요는 그 때를 반추했다. 일본치고 추운 날이 계속 되던 겨울이었다. 도로 가장자리에는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고, 차도나 인도나 할 것 없이 얼음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열차 또한 마찬가지라, 휴행과 서행, 지연운행을 하고 있었다. 카나가와가 그러했으니 좀 더 북쪽은 눈의 나라였을 것이다.

   마나미와 토도는 그 때, 삿포로에 다녀왔다. 삿포로를 추천한 건 도바시였다. 꼭 서로만 있을 공간이 필요하다기에 별 생각 없이 추천한 곳이었다. 삿포로에 갈까요, 라는 말이 유명한 건 눈이 많이 와서 교통편이 끊기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자 눈이 반짝거리던 마나미 또한 기억한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의 그도 기억한다. 마치 어제 같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마음이 답답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바시 군은 감각적이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있지? 라고 묻던 눈동자가 흔들리던 것 또한 기억한다. 섬세하니까, 지금 무슨 느낌인지 알아줄 수 있을 거야. 말하지 않아도. 라고 말하면서 그는 먹구름이 잔뜩 낀 겨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입은 얇은 야상은 카키색이었고, 클릿이 아닌 일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도바시는 그 날의 마나미가 유난히 「흩어질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열차는 멈추지 않았다. 마나미가 삿포로를 빠져나올 때에는 눈 또한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묘하게 따듯한 날이었다. 길이 얼지 않아 자동차 바퀴에 체인을 걸지 않아도 되었다고 했다. 체크아웃을 할 때 여관의 프론트에서는 별 일도 다 있네요, 분명 행운의 징조일 거예요. 라고 말했다면서 마나미는 실실 웃었다. 그러냐, 라고 말하면서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마나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이후 마나미는 언 도로로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가 십 분이 지나지 않아 되돌아오곤 했다. 제대로 탈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의 리미트가 걸린 것처럼 굴었다. 눈이 녹으면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하면서 롤러를 탔다. 그렇게 롤러에 열중하고 있는 그는 만난 이후 처음이었다. 모든 감각을 전부 이용해 자유롭게 날 듯 달리는 게 마나미 산가쿠라는 남자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삶의 방식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게 죽음이라면 그는 그 때 한 번, 죽음을 경험한 것이었다. 자유롭게 달리라고 말했기 때문에 달릴 수 없다는 건 매우 모순적이다. 그가 달리는 방식에는 토도 진파치가 녹아 있다. 그에게 처음 「자유롭게 달리라」는 오더를 준 건 그 누구도 아닌 토도 진파치였기 때문이다.

   사실 행운의 징조는 아니었다. 그는 오래, 그와 함께 있고 싶었을 것이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도바시는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노을과 맞닿은 여름 하늘은 꼭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는 토도를 찾아갔다던 미야하라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화를 냈다. 드문 일이었다. 자유롭게 달리게 하기 위해서 언제나, 헤어질 생각을 하고 만나고 있었다는 남자를 그녀는 아마 평생이 가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토도는 연인이기 이전에 선배였다. 마나미의 주행 방식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을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깊게 이해했던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족쇄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그 모순적인 언어는 토도라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도바시는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명백한 타자他者였지만, 그를 어쩐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차마 기르는 새의 날개를 자를 수 없었던 것이다.


   ―토도 선배는 약았어.


   도바시는 그 말을 하던 마나미를 떠올렸다. 토도가 갑자기 근교에 집을 짓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때도 환한 여름이었다. 일본 사상 최대의 폭염이라는 헤드라인이 며칠 동안 걸렸던 것을 기억한다. 마나미는 그늘 가에 앉아 룩을 비스듬히 세워두고 있었다. 그는 소다맛 하드를 세게 씹다가,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오랜만에 들은 이름에 뭐가, 라고 퉁명스럽게 묻자 마나미는 눈을 마주쳐왔다.


   ―바시 군은 이런 점에서 편하네.   

   ―그러니까 뭐가.

   ―멋대로 짐작해주지 않는다는 게 좋아.


   마나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방긋방긋 웃었다. 마냥 착했던 고등학생을 졸업했다고 말한 그는 소다맛 하드를 몇 입 더 깨물었다. 먼 곳을 응시하다가 돌연 얼굴을 찌푸렸다. 있잖아, 바시 군. 나는 말이지. 내 사랑이 족쇄가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 해 본적이 없어. 마지막 스퍼트를 위해서 엉덩이를 밀어주는 느낌이라고 느꼈단 말이지. 같이 사랑하고 있는데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게 좀 신기하지 않아?

   도바시는 헛소리 하지 말고 자전거나 똑바로 세워 두라고 충고했다. 성실하네~ 라고 느긋하게 대답하면서 마나미는 양달로 나갔다. 환하게 뻗는 태양이 그의 머리카락에 곧게 닿았다. 환한 파랑이었다. 뒤의 하늘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색이었다. 무슨 이야길 하는질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니, 마나미는 바시 군이 제대로 모르는 이야기라서 그래, 라고 대답하며 후후 웃었다.


   ―진짜 좋아했는데.

   ―미련이라도 남냐.

   ―미련? 안 끝낸 사랑도 미련이라고 해?


   질문을 하는 마나미의 시선은 직선이다. 무어라 대답할 수 없어서 말을 얼버무리자, 그는 미안, 하고 짧게 사과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고선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입 안으로 모두 넣은 채, 쓰레기통으로 남은 막대를 던졌다. 그것은 흔들림 없이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도바시는 볼을 긁적였다. 마나미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몇 번이고 곱씹었던 대화였다. 처음에는 내 세상까지 모두 가둘 새장이 될 생각으로 손을 잡아줬으면서, 나중에는 그걸 못 하겠으니까 도망간 거야. 용기 없고 바보 같아.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나 때문에 떠나버렸어. 그래서 내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야. 그래서 토도 선배는 일본에 올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마나미는 중요한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그 말을 할 때의 마나미는 어쩐지 슬퍼보였다. 여름 특유의 그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 라고 말하자 마나미는 부드럽게 웃었다. 산 정상을 눈앞에 둔 것처럼, 집중력이 올라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도바시는 뙤약볕 아래에서 오래 달린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여전히 그와 보낸 계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도바시는 그의 실종 기간과 토도의 귀국 기간이 묘하게 겹친다고 생각했다. 아니겠지,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쉬면 복이 달아난다는 이즈미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다는 그의 표정을 보다가, 오늘은 술이나 먹으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모두 동의하는 지, 하나 둘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마나미 선배는 어디 있었던 걸까요.”


   유토가 건너가는 소리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이 일대를 완전 뒤졌었는데 아무도 못 찾았잖아. 쿠로다는 그렇게 말하면서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올렸다. 이즈미다는 정기 모임 참석자 명단을 다시 파일에 넣으면서 그렇지, 라고 짧게 대답했다. 도바시는 그가 토도의 집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러다 얇은 카디건을 접고 있던 아시키바가 음- 하며 허밍 같은 소리를 늘리더니,


   “왠지 마나미라면 『너는 펫』처럼 살았을 것 같아.”

   “그러네, 뭔가 시손 쥰 버전처럼.”

   “집안에 중간 복층이 있고?” 

   “응. 뭔가 인텔리하고 프로페셔널한 사람한테 길러진다던가.”

   “중간에 애인이 오면 개 짖는 소리도 냈겠네요.”

   “욕조에 다 벗은 채로 얌전히 들어가 있으면 썬글라스를 낀 미인이 머리카락을 샴푸해주는 그런 거?”

   “이름도 모모- 하고 부르고요.”

   “개 이름이 모모였나?”

   “아닌가? 모모였던 것 같은데.”

   “좀 더 개 같은 이름 아니었나. 왕코라던가.”

   “음,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거 결말이 어떻게 되더라.”

   “해피엔딩은 아니고 좀 찝찝했던 것 같은데.”

   “유키, 드라마 열심히 보는 타입이구나.”

   “그냥! 결말을 모르면 찝찝하잖아!”


   모두가 농담처럼 한 두 마디씩을 건넸다. 그가 안전하단 걸 확인 한 다음에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꺼냈던 의자를 전부 테이블 밑에 넣어두고 하나 둘 씩 가게를 빠져나갔다. 도바시는 맨 마지막으로 나갔다. 급하게 경사진 계단을 한 발 한 발 엉금엉금 내려갔다. 문 밖은 푹푹 찌는 여름이었다. 떠 있는 해에 눈이 부셨다. 

   땀이 마른자리에 또 다시 땀이 흐르고, 그것을 텁텁한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숨이 막힐 정도의 더위였다. 카페에 가지런히 세워둔 자전거들의 잠금장치를 풀면서, 쿠로다가 토도 선배가 귀국 했다는데 마나미랑 같이 만날 수 있으려나? 하고 물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목소리에 이즈미다는 휴가가 언제까지인지, 몸 상태가 나올만한 상태인지 체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론적인 말이었다.

   하야토 군을 통해서 물어볼까요, 라고 유토가 말했다. 도바시는 안장에 걸터앉으면서, 역시 직접 말하긴 좀 그렇지. 라고 던지듯 말했다. 쿠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럴까를 이야기하며 페달을 밟았다. 사이클링에 가까운 느린 속도였다. 미지근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바시는 아직 제 사랑이 끝나지 않았으니 미련이 아니라고 말하던 마나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가 내는 소리는 무언가의 선언 같이 들리곤 했다. 그는 『이길 줄 아는』 남자였고, 그것은 사랑에도 해당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별 거 아닌 일이었고, 별 거 아닌 단상이었지만, 어쩐지 여름녘에 길어지는 그림자처럼 짙게 남아 있었다. 

   도바시는 페달을 밟았다. 그는 미지근한 바람과 함께 가속하며, 마나미가 돌아오면 결론을 어떻게 냈든 ‘잘 했어’ 라고 해 줄 생각이었다. 사랑하고 싶어, 라고 말하면서 부드럽게 웃던 그 해 여름 소년의 표정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환하고 맑았다.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파란 하늘처럼, 흐릴 것을 모르고 한없이 더운 한여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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